상단여백
HOME 기획특집
낙동강 1,300리 누각과 정자 이야기(22회)한국 4대 누각 안동시 영호루
비사벌뉴스 | 승인 2024.04.11 20:16

고려 공민왕과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
조선 시대 4번, 일제강점기 3~4번 떠내려가

글, 사진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

안동시 영호루 현재모습

누(樓)란 문과 벽이 없고 기둥만 있어 사방이 탁 트여 있는 건물이다. 2층으로 높여 지은 다락 형식이다. 관아에 딸린 건물로 공적인 행사가 주로 열렸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관리들이 즐겨 찾아 시를 짓고 시판을 새겨 걸어 당파를 떠나 선비문화를 꽃피운 창작의 공간이었다.
흔히 한국 3대 누각을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의 부벽루라 한다. 그 밖에 합천 함벽루, 안동 영호루, 울산의 태화루, 삼척의 죽서루 등이 있다.

○ 안동도호부에 딸린 영호루(映湖樓)
안동도호부의 부속건물인 영호루는 도호부의 공식적인 행사를 하는 공간이다. 안동 남쪽 낙동강 강가에 있는 영호루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삼대루(嶺南三大樓)의 하나다. 울산광역시에서는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를 포함하여 3대 누각이라 부른다.

누의 위쪽은 남쪽에서 안동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지나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또 뒤쪽은 안동 읍성과 안기역으로 가는 갈림길 있어서 누는 지나는 길옆에 있었다. 그래서 많은 시인 묵객이 누에 올라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시를 지으며 아름다움에 취하곤 했다.

누는 시내와 가깝고 경치가 좋으며, 맑은 강물이 호수 같아 선유(船遊, 뱃놀이) 하기 좋아 고을 백성들과 지나는 나그네들의 쉬어가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강과 너무 가까워 홍수 때마다 떠내려가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밀양 영남루 정면(1888-1889년 프랑스인 샤를바라가 조선 여행시 스케치) 문성남밀양문화관광해설사 제공

○ 영호루(映湖樓) 역사
영호루(映湖樓)는 누가 언제 세웠는지 기록이 없다. 
고려 시대 김방경(金方慶) 장군이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영호루에서 시를 지은 기록이 있어 고려 중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널리 알려진 것은 고려 공민왕 때다. 1361년(공민왕 10) 10월 홍건적이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현 안동시)까지 피난 왔다. 
공민왕은 복주 관아에 머물며 영호루에 나가 군사 훈련을 참관하고 군령을 내렸으며, 배를 타거나 활을 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개경으로 돌아간 후 1366년(공민왕 15) 영호루(映湖樓) 현판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권사복(權思復) 앞에서 직접 썼다. 
다음 해(1367년) 안동 판관 신자전(申子展)은 누의 크기가 작아 왕이 하사한 현판과 맞지 않아 누를 강가에 바짝 붙여 크게 다시 세웠다.

그 후 조선 1488년(성종 19) 누가 낡아 부사 김질(金耋)이 고쳐 지었다. 1547년(명종 2) 홍수로 떠내려가자 1552년(명종 7년)에 부사 안한준이 원래대로 다시 지었다. 
1605년(선조 38) 두 번째 유실(流失, 물에 떠내려감)이 있었고, 71년 후인 1676년(숙종 2) 부사 맹주서(孟冑瑞)가 복원하였다. 1775년(영조 51) 세 번째 유실이 있었고, 1788년(정조 12) 부사 신익빈이 복원했고, 4년 후 1792년(정조 16) 네 번째 유실됐다. 4년 후 1796년(정조 20) 부사 이집두가 복원했다.
1820년(순조 20) 부사 김학순(金學淳)이 낡은 누를 고치고,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란 글을 쓰고 커다란 현판을 달았다.

안동 영호루 옛모습(1934년)

○ 시련의 영호루 현판 이야기
조선 시대 4번, 일제강점기 3~4번 떠내려감
영호루에 걸렸던 수많은 현판의 유실, 회수, 복원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금자현판(金子懸板) ‘영호루’에 관한 자료는 기록과 전설로 전하고 있다.
1547년(명종 2) 7월에 큰 홍수 때 영호루는 물에 떠내려갔다. 그해 가을 경남 김해 강가에서 금자현판을 찾아 부사 안한준은 1552년(명종 7) 누를 복원하고 다시 달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명나라 설호신(薛虎臣) 부대가 주둔했는데 병사들이 현판을 파손한 것을 1602년(선조 35) 부사 황극중(黃克中)이 보수하고, 1603년(선조 36)에 부사 홍이상(洪履祥)이 금칠을 했다.
1605년(선조 38) 홍수로 다시 현판이 없어지자 부사 김륵(金玏)은 현판을 찾기 위해 강 하류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는 등 노력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 후 70년이 지난 1675년(숙종 1)에 낙동강 하류 김해 명지도(鳴旨島) 개펄에서 이상한 빛이 서렸다. 섬사람들이 개펄을 파서 현판을 찾았다. 안동부사 맹주서(孟冑瑞)는 다음 해인 1676년(숙종 2)에 영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다시 걸었다.

1775년(영조 51)에 세 번째 유실되었다. 
때마침 영호루에서 쉬고 있던 늙은 승려가 현판과 서까래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하회마을 건너편 겸암정 앞 강가에 도착해 현판을 가져왔다. 이 현판을 안동부에서 보관해 오다가 13년 후인 1788년(정조 12) 부사 신익빈이 영호루를 복원해 현판을 달았다.

복원한 지 4년째인 1792년(정조 16)에 네 번째 유실이 있었다. 그해 가을 상주 낙동 강가에서 ‘영호루’ 현판을 찾아 1796년(정조 20) 부사 이집두가 영호루를 복원하고 예전과 같이 걸었다 그 후 1934년까지 여러 번의 홍수가 있었으나 누와 현판은 잘 지켜졌다. 조선 시대 4번, 일제강점기 3~4번 등 7~8회 잃어버렸다 다시 찾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진주 촉석루(1949년)

○ 일제강점기 유실과 복원
일제강점기(1910~1945)는 홍수의 연속이었다.
대홍수라 할 수 있는 홍수가 1916년, 1919년, 1920년, 1922년, 1923년, 1925년, 1926년, 1928년, 1930년, 1933년, 1934년 등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1916년~1935년 20년 동안 11번의 대홍수가 있었다.
낙동강 대홍수는 1920년에 발생한 경신대홍수로 사망한 사람이 1,100명이었다. 가장 대규모 홍수는 1925년 을축대홍수다(사망 427명).  

일제강점기 1934년 7월 영호루는 다섯 번째로 유실됐다. 이때 홍수는 안동지방이 아닌 강 상류 태백, 봉화, 영양, 청송 등지의 폭우로 안동시는 물에 잠기고, 영호루 처마 끝까지 물이 차올라 떠내려갔다.
강물이 줄어 영호루 옛터에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영호루 현판은 그해 가을 구미 근처 강에서 찾았다. 그 외의 시문이 쓰인 시판도 여러 점을 찾아 안동 군청에서 보관해 왔다.
36년이 지난 1970년 11월 강 건너 언덕에 누를 복원하고 보관된 ‘영호루’ 금자현판과 그 외의 현판도 걸었다. 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인 ‘영호루’도 걸렸다.

1970년에 뜻이 있는 안동인들이 모금한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의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 위치(안동시 남선면 정하동)에 새로 세웠다.
그리고 1992년 안동문화원에서 영호루 옛터 북쪽 약 20m에 영호루유허비(映湖樓遺墟碑)를 세웠다.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저작권자 © 비사벌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비사벌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신문사소개고충처리제도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인터넷신문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만길 18  |  대표전화 : 055)532-0505  |  팩스: 055)532-0473
    사업자등록번호 : 608-81-87983  |  등록번호 : 경남 아02351  |  등록일자 : 2015. 7. 2 (최초발행일자 : 2015. 7. 2)  |  발행일자 : 2017. 7. 24
    발행인 : 조지영  |  편집인 : 오종식  |  청소년보호책임자 : 오종식
    편집부 : 055)532-0505  |   취재본부 : 055)532-0505  |  광고부 : 055)532-0505  |  이메일 : bsb2718@hanmail.net
    Copyright © 2024 비사벌뉴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