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개경포

낙동강 너울길에서 임진년 의병들을 만난다. 새해 일출을 품에 안고 개포 나루터 주민들이 나누는 떡국과 달달커피 한 잔에 포만감을 느끼며 강 따라 걷는다. 길을 걸으면 자연의 속삭임은 일상이고 새들의 소리와 빠른 움직임은 덤이다. 작고 앙증맞은 산새인 나무발발이가 먹이 찾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숲새들의 영토에 들어섰다. 카메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잽싸게 가지를 타고 올랐다가 이내 벌새처럼 날갯짓하며 느릅나무 열매를 찾아 먹는다. 박새나 긴 꼬리를 가진 오목눈이의 분주함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참나무 잎으로 켜켜이 쌓인 너울길(개비리길)에는 열매를 품은 숲 나뭇가지에는 산새들의 움직임이 귀와 눈을 즐겁게 한다. 간혹 숲속에 자리한 맹금류가 푸드덕하며 날 때는 나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질하며 잠시 호흡을 고른다. 강물은 무심히 흐르지만 물과 숲이 만든 열매들로 계절 따라 날아드는 산새들에게는 삶터이다. 이런 오솔길을 걷는 길손에게는 좋은 친구가 된다. 간혹 숲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더욱 반갑다. 몇 마디 말을 섞다가 이 길을 자주 걷는 사람이라면 좋은 말벗이 되기도 한다.

오늘 만난 노부부는 독일에서 40여 년을 살다가 합천 고향 땅에 살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아 5년 전 이곳이 좋아 삶터로 잡았단다. 독일에 살면서 느낀 것은 조선의 여러 가지 시대적 과제들을 일부 학자들이 독점하여 역사, 철학 등을 왜곡 해석하여 시중에 유포하는 것에 중국이나 독일 등 다른 나라의 책을 통하여 스승 없이 공부하고 있단다. 때가 되면 책이라도 남기고 싶어 공부하고 있단다. 오전에는 부부가 산책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는 평등하지 못한 한국 사회를 많이 걱정했다. 1시간여 길을 걸으며 편안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 이름조차 나누지 못했지만 47년생으로 대구에서 공부했고, 71년 독일 광부로 떠나 박정희 시절 정치권력 유지를 위해 조작한 남민전 공안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죽어간 ‘여정남’ 이름을 들먹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더 깊이 그 이름과의 인연을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경북대 시절 인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에서 살면서 70년대 김형욱을 비롯한 중정의 간첩 조작 사건들을 보면서 조국의 상황에 대한 분노와 좌절은 어떠했으리라는 감정은 당시 동시대를 살았던 나로서도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남강 모래톱과 고라니

여정남에 관한 언론 보도를 첨부한다.

민주화운동 故 이재문.여정남씨 명예졸업장

(대구=연합뉴스) 박순기 기자 =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및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각각 숨진 이재문·여정남 씨가 모교인 경북대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다. 23일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따르면 오는 25일 경북대 복현회관에서 두 고인에 대한 명예졸업장과 공로패를 유족들에게 전달한다. 이 학과 '54학번인 이 씨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돼 1981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고, '64학번인 여 씨는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으로 1974년 사형당했다. 이들의 유족은 작년 법원으로부터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사법적 명예 회복과 함께 국가 손해배상금을 받았다. 윤순갑 교수(정치학과. 준비위원)는 "고인들의 민주화운동과 인권 의식을 학과 동문들이 이어가기 위해 명예졸업장과 공로패를 전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와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낙동강을 따라 조선 선비정신과 임진왜란과 일제 침략 시에 의병,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하자, 조금만 더 걸으면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크게 승리한 장소와 비문을 볼 수 있다며 길을 재촉한다. 비문에는 평소 고령 박씨 문중에서 익히 들었던 임진왜란 때 의병이었던 박정완, 박정번 형제가 대가야 산성이 있던 이곳 개산포 전투에서 승리한 기록이었다. 참! 반가운 역사의 강이 흐르는 곳에서 부래정 가는 오솔길에서 발품 판 덕에 반가운 조선 선비를 만나는 셈이다. 박정번은 임진왜란 개산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김면 의병장 수하에서 활약한 사실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다.

2024년 개경포 새해 일출사진

박정번은 '고령디지털 문화대전'에 기록이 있다.

박정번(朴廷璠)[1550~1611]은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송암(松庵) 김면(金沔) 진영에서 의병 참모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다. 도진(桃津) 마을 뒤 개산포전투(開山浦戰鬪)를 사실상 주도하여 가형(家兄) 박정완(朴廷琓)과 가동(家僮)을 이끌고 승리하였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친척으로 정유재란 때에는 함께 화왕산에 입성하였다. 선조 때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난이 끝나자 문연서당(文淵書堂)을 열어 후학들을 육성하였으며, 학암정(鶴巖亭), 부래정(浮來亭)을 지어 경상우도의 여러 의병들과 함께 어울렸다.

박정번은 한강 정구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강이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도동서원을 세울 때 박정번 집에서 숙식하며 함께 강을 건너 건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도동서원 방문객들에게 해설사들이 자랑하는 서원 축대의 예술적 디자인을 제안한 인물이 박정번이라고 고령 도진마을 이장이 전해오는 이야기 한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따듯한 햇살 아래서 무엇보다 반가운 일은 개산포 전투에서 남명의 제자인 김면을 비롯한 인연의 실타래가 이 비석문 하나로 다 이어진다.

풀섭 기리기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과 곽재우 그리고 한강의 족적이 되살아나고 또 한강의 제자인 박정완, 박정번 형제로 이어지는 낙동강 임진년 전쟁 중 개산포 전투의 승리로 낙동강 변 문중들의 의병운동이 역사 속에 빛나는 것이다. 한편 오래전 대가야 시절부터 중요한 군사시설이 새해 아침 햇살을 맞은 개진포(개포)를 지나 개산포 비문 앞에서 산새 소리와 함께 용의 해에 큰 기운을 받아 생태 전환 시민민주주의가 하루빨리 도래하기를 두 손 모아본다. 어쩌면 임진왜란이 불행한 전쟁이었지만 조선 사회의 선비정신과 민중들이 기득권 왕권과 기득권 양반 계층의 부패한 꾸짖음에 앞장선 남명 조식의 단성소와 철학에 기반한 정인홍과 곽재우 등의 의병 정신을 목도 함으로써 일제 침략 때도 끈질긴 항쟁으로, 오늘날에는 민주 시민사회로 이행하는데 디딤돌이 되었을 것이라고 자문자답해본다. 나아가 어둠의 정치가 일시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뜨거운 민중들의 분노와 절제 있는 상식적 판단이 역사의 강을 막아도 언젠가는 기후 위기 시대 스스로 무너지면서 인간사도 ‘상선약수’의 이치에 따르리라.

낙동강 변 도진마을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 활동을 기록한 고령 신문 자료도 첨부하면서 새해 첫날 방문한 너울길(개비리길)을 다시 찾으리라는 다짐하며 회천으로 호사비오리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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