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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지는 우포늪에서 창녕 출신 하인두 추상화가를 소환한다글, 사진 이인식위원
비사벌뉴스 | 승인 2023.05.25 19:07

몇 년 전에 창녕 출신 하인두 갤러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비사벌 신문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리고 오구라 컬렉션이 동경박물관 아시아관에 기증한 비화가야 고분군에서 도굴한 것을 구입해 간 금동관모, 새날개모양관식, 환두대도 등을 환수하기 전 현장 확인과 양국 협의로 기획 전시를 창녕박물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한국에서는 오구라 컬렉션을 반드시 환수해야 할 대상으로 꼽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개인 소장품으로서 감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화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한국으로 돌려받기 위해서는 양국 간의 협력과 합의가 필요하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범 군민적 협의체가 군수를 중심으로 민관산학전문가 집단으로 꾸려져야 한다. 이번 호에는 하인두 갤러리 만들기 운동을 위해 그의 삶과 작품의 족적을 찾아간다.

하인두는 방아잎과 식해를 좋아했다

‘화가 하인두, 좋아한 방아잎 향기처럼 ‘휘발성 삶’ 살아’라는 글이 있다. 하인두는 서울에 살면서 방아잎이 들어가는 싸한 맛의 경상도식 부추전을 좋아했다. 부추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면 고향 창녕에 돌아온 듯했다. 아천동 집에는 하인두의 누나도 와서 함께 살았다. 누나는 동생을 위해 가자미식해를 만들었다. 함경도 음식 가자미식해를 피란지 부산에서 배웠던 모양이다. 시누이의 손맛은 올케에게 전해졌다. 이 대목에서 창녕 식기(식해)가 함경도 음식을 배워서인지 아니면 창녕식 식해를 어릴 적부터 먹어보아서 인지는 더 알아봐야 할 일이다. 다만 그는 어릴 적 가야 고분에서 노을을 보며 창녕중학 시절을 보낸 경험에 비추어 먹는 것과 그의 작품 성격에 고향 삶의 흔적이 묻어 있으리라 생각된다. “ 불화, 단청, 민화, 무속화 등 전통적 한국미의 본질 및 그 조형적 정신성을 자유롭게 사용하였고, 장식적인 색상과 화면의 구성적 신비감, 그리고 생성과 확산의 표상의 종교적 내지 철학적인 뜻을 작품 속에 구현하였다. 그 결과 화면 구조는 평면적이고 색채는 강하고 찬란하게 형상되며, 현대적인 불화 또는 성당 건물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작업으로 나타났다.”는 평론가들의 글을 연결시켜 보면 언젠가는 창녕 고향 땅에 그의 작품을 전시할 공간이 꼭 필요함을 군민들은 알았으면 좋겠다. 특히 그의 서울대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구상평론가는 “하인두는 색채와 형태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은 형이상학적이며 불교적인 관념을 담고 있으며, 한국 전통과 불교 사상을 기조로 한 비정형 추상화의 선구자였다. 그는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통해 우주와 인간,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깊이와 폭이 있으며, 감각과 정신을 동시에 자극한다. 그는 자기 삶과 예술을 하나로 만들었으며, 그것은 휘발성이었다. 그는 방아잎 향기처럼 사라져버렸지만, 그의 작품은 영원히 남아있다.”고 썼다. 그는 1930년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를 거쳐 195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한 첫 세대로 1957년 20대 청년 작가들의 전향적 단체였던 현대미술가협회에 창립회원으로 참가하였다. 1960년 10월 나이 31살 때, 어느 날 밤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여 대접해 보내드린 뒤, 그 손님은 경찰에게 체포당했고 하인두는 손님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국가보안법상 불고지’ 항목 위반죄로 투옥당했다. 4개월 형에 2년의 집행유예 및 자격정지 선고를 받았다. 1962년까지 김창렬, 박서보 등과 ACTUEL 창립멤버를 하면서 '앵포르멜' 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 뒤 약 10년간은 다분히 옵티칼 아트(optical art)를 수용한 기하학적인 색면추상 작업으로 넘어갔다. 그 표현 정신은 불교의 선(禪) 사상의 심취를 반영한 「회(廻)」, 「윤(輪)」 등의 작품에서 확인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는 그간의 기하학적 구조를 벗어나 유동적인 파상선과 확산적인 기호 형상으로 불교 사상의 뜻을 한층 선명히 한 화면을 추구하며, 「밀문(密門)」, 「만다라(曼茶羅)」 등의 이름을 붙였다. 「만다라」 연작은 60년대 말 국내 화단에 유입된 옵티칼 아트를 수용하면서, 불교적 상징 세계를 도입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는 서구적 추상주의 회화에 대한 동양적 또는 한국적 표현 정신의 발로이자 그에 따른 창작적 조형 추구의 실현이었다. 하인두 선생은 가야의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진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과 글을 통해 그의 미적 감각과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나무위키 백과)

화가 하인두는 시인 천상병과 친했다.

두 사람은 용모도 성격도 너무 다르다. 하인두가 깔끔하고 섬세한 미남에 약간 선병질적이라면 천상병은 울퉁불퉁한 얼굴에 큰 목소리로 거침이 없었다. 가난한 나에게 내가 오천 원을 달라 할 때도 만원을 달라 할 때도 너는 “알았다” “알았다” 했다. 인두야 너나 나는 더 살아야 된다. 너는 화가, 나는 시인이다. 잊지 말라 요놈아 ! (‘내가 아는 화가, 천상병’, 계간 화랑 1987년 겨울호 재인용) 천상병은 인사동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일용할 양식이란 명분으로 천원, 이천 원을 얻어다 썼다. 역시 인사동을 자주 들렀던 하인두는 천상병에게 남들보다 더 큰돈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림도 그려 주었다. 하인두(1930~1989)와 천상병(1930~ 1993)은 동갑내기다. 천상병이 1월생, 하인두가 8월생인데, 하인두가 형 노릇을 하려 한다고 천상병은 장난스레 불평했다. 하인두는 고향이 창녕읍이고 천상병은 창원 진동이다. 고향도 가깝지만 둘은 부산피란 시절의 서울대를 함께 다녔다. 한 사람은 미대 한 사람은 상대였다.

하인두는 창녕중학교를 다녔다.

창녕 출신의 하인두는 소년 시절 형을 따라 평양, 제천 등지를 전전했다. 해방되자 창녕으로 돌아와서 새로 생긴 창녕중학교를 다녔다. 마산, 진주 같은 도시에도 미술 교사가 부족할 때다. 하인두가 다닌 창녕중에는 다행히도 임충묵이라는 미술 교사가 있었다. 미술 재료를 구하기도 힘든 창녕읍에서 하인두는 화가의 꿈을 꾸었다. 1949년 상경해 흑석동에 있는 남관(1913~1990)의 창림미술연구소를 찾았다. 홍익대에 입학한 이듬해 6·25 전쟁이 났다.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2학년으로 편입했다. 1952년 서울대 미대 3년생인 하인두는 상대 2년생인 천상병을 만났다. 천상병은 이미 추천을 받은 시인이었고 하인두는 문학청년이었다. 하인두는 1953년 말에 환도했다. 천상병, 최종태(조각), 이남규(서양화), 정건모(서양화), 이일(미술평론) 등과 어울렸다. 문학과 미술, 모두를 열망하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우정은 명동의 천막집, 벽돌집, 북어집으로 불리던 대폿집의 막걸릿잔 속에서 익어 갔다. 하인두는 말수는 적었지만, 촌철살인으로 늘 좌중을 압도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비쩍 마른 미남 청년 하인두의 별명은 하딜리아니, 그의 작은 형 시인 하인회는 하이네로 불리었다. 하이네와 하딜리아니는 우애가 각별했다. 종이를 오려 캔버스 위에 붙인 다음 콤프레셔에 물린 분무기로 유채를 뿜어서 묻히고 종이를 다시 떼어내며 붙이기를 반복하는 어려운 작업을 할 때면 하이네가 와서 하딜리아니를 도와주었다. 하인두는 부산으로 내려가 활동을 하다 1958년에 다시 상경했다. 하인두의 ‘안국동 시대’가 시작됐다. 덕성여중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서 가까운 안국동 로터리의 도라지 다방에 나이 또래의 화가들이 모였다. 하인두, 박서보, 김서봉, 안상철, 김창렬 등이었다. 함안 출신의 안상철(1927~1993)은 덕성여고 교사 안의 온고당이라는 한옥에서 살았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통금에 몰려갈 데가 없어진 화가 친구들은 월담해서 이 아지트로 몰려들었다. 시인 고은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인두와 천상병은 아픈 상처를 공유한 동병상련의 친구였다. 하인두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권오극이 북에서 내려온 줄도 모르고 집에 재워 주었다가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1960년 10월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봄에 풀려났다. 덕성여중 교사직도 물러나야만 했다.

하인두의 부인 류민자는 한국화 화가다.

인두가 덕성여중 미술 교사로 근무할 때 덕성여고 학생으로 대학 동기이자 동료 교사인 안상철에게서 그림을 배우던 제자였다. 1966년에 둘은 우연히 만나 이듬해 결혼을 했다. 1976년에 극적으로 찾아온 해외여행의 기회는 작가 하인두에게는 절호의 해외 진출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 류민자는 덕성여고 미술 교사였다. 오랜 소망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그다드에서 며칠간의 회의를 마치고 나면 몇 달이고 파리에 머물며 유럽을 둘러보게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류민자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받은 퇴직금으로 남편의 여비를 마련했다. 류민자는 오랫동안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집안의 경제를 도맡았다. 하인두의 가족은 홍제동, 방배동을 거쳐 1981년 구리시 아천동으로 이사했다.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창녕에서 방아 모종을 가져와서 마당에 심었다. 방아는 경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남방계 허브다. 여름이 되면 된장찌개, 피라미 매운탕, 장엇국, 부추전 등에 방아가 꼭 들어간다. 남도의 여름을 지배하는 방아는 강렬하고 매력적인 향기를 피운다. 십수 년 전부터 서울에도 방아가 눈에 많이 띈다. 평균기온이 올라 방아의 생장 조건이 갖추어진 데다 서울 거주의 경남 출신들이 여기저기 씨를 뿌린 까닭이다. 그 선구자가 하인두 가족이었다. 방아잎의 향은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잎을 따서 두면 금방 향이 사라져버린다. 잎을 따자마자 음식에 넣어야 제맛이 난다. 하인두는 방아잎이 들어가는 싸한 맛의 경상도식 부추전을 좋아했다. 부추전에 막걸리를 곁들이면 고향 창녕에 돌아온 듯했다. 이렇듯 하인두는 고향을 잊지 못하고 천상병, 구상 등 좋은 친구들과 하늘나라에서 같이 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자들이 그의 정신과 남아있는 작품들을 가족들과 협의하여 고향에 갤러리를 마련해 보자. 진주 이성자 미술관처럼 고향의 노을과 빛나는 밤 별처럼 우포 하늘에 반짝이기를 기대하고 두 손 모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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