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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沈齋) 선생과 유학(儒學)의 맥락
비사벌뉴스 | 승인 2022.11.22 14:00
김영일(수필가, 사학자, 언론인)

예로부터 영남에는 성리학(性理學)을 탐구하는 유생이 많았다. 조선 초기에는 야은(冶隱, 吉再)의 제자 강호산인(江湖散人, 金叔滋)과 점필재(佔畢齋, 金宗直) 부자(父子)에게 사사(師事)한 한훤당(寒暄堂, 金宏弼)과 계운(季雲, 金馹孫), 일두(一蠹, 鄭汝昌)가 있으며, 그들로부터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퇴계(退溪, 이황)와 남명(南冥, 曺植) 이 사림파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다. 또, 한훤당의 외 증손으로 그의 학맥을 계승한 한강(寒岡, 鄭逑) 또한 창녕 현감을 지내는 등 관료이며 학자로 문인 배출에 이바지했다. 고려 말엽부터 영남지역에 유생이 많았던 건 성균관을 중흥하고 교육한 신돈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들 중에는 조선건국에 직접 참여하고 출세한 정도전 등 관학파(勳舊派)가 주류를 이루었고,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조식으로 이어지는 사림파 즉, 영남에 기반을 둔 은둔 유학자도 있다. 사림파는 조선건국 후 백 년이 지난, 성종 대에 가서야 출셋길이 열렸지만, 훈구세력에 밀려 사화(士禍)를 겪는 등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용케 살아남은 이들도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낙향해 후진 양성에 만족해야 했다.

조선을 병들게 한 당파싸움도 훈구파와 사림파의 이전투구(泥田鬪狗)에서 비롯되었으며, 정치와 담을 쌓고 지내던 대부분은 구한말까지 학문정진에만 전념했으며, 심재(沈齋)와 동료 학자, 제자들이 지역의 대표 문인으로 기억된다.

먼저, 구한말 영남 유학의 태두(泰斗)는 단연 심재(沈齋 曺兢燮, 1873-1933) 선생이다. 그를 빼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그의 학맥은 한강으로부터 내려온다. 한강(寒岡, 鄭逑)은 창녕 현감을 지낸 분으로 행정 못지않게 후진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인 분이다. 하지만 우리 고장에 한강의 위업이 현존하지 않아, 비문과 유적이 있는 다른 지역과 비교되어 안타깝다. 고암면 관산 서당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심재의 본관은 창녕이며, 고암면 원촌 조병의(曺炳義)옹이 그의 부친이다. 그는 11세 때 근사록(近思錄)을 필사(筆寫)할 정도로 학문을 일찍 깨우쳤다. 23세에 [남명집(南冥集)] 복간에 참여하는 등 전도가 양양했으나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이후, 스스로 외부출입을 삼가고 동서양의 학문을 비교 분석한 [곤언(困言)]을 저술하고 [거빈해(居貧解)]와 [성존심비변(性尊心卑辯)] 등의 논문을 남겼다. 부친상을 당한 뒤에는 달성군 가창에 은거하며 정산 서당을 세우고 후학을 가르쳤다. 또, 비슬산 자락에 구계 서당을 짓고 제자를 양성하다가 6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는 『암서집(巖棲集)』, 『심재집(深齋集)』 41권 20책과 『조명록(措明錄)』이 있다. 이러한 대학자의 위업을 계승 발전시키고 숭상하는 노력이 없어서 안타깝다. 우리 지역에는 그의 학문을 연구하는 교육기관이나 기념비가 없다. 이웃 대구 모 대학에서 [심재학(深齋學)] 연구소가 있다고 하니 부끄럽지만 다행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며 실천적 유학자 김희봉(金熙琫, 1874-1928) 선생도 있다. 그는 심재의 죽마고우(竹馬故友)로 한훤당의 후손이 된다. 무오사화 이후 고암면 깊은 골짜기에 칩거한 한훤당의 차남 김언상(金彦庠)의 후손으로 계팔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글공부도 중하지만 자주독립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 기미년 3.1.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영남 유림으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발각되어 심재와 함께 대구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 뒤, 3.1 운동 1주기를 맞아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 장날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慟哭我八域 同胞 五州列强)」이라는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1월 7일 사망했다. 70년 뒤인, 1999년에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성암 노근용(誠庵 盧根容, 1884-1965) 선생은 광주 노씨로 이방 마수에서 노수엽 옹과 벽진 이씨 사이에 태어나 서흥 김씨와 혼인했다. 당대 최고 학자인 이종기(李鐘杞), 노상직(盧相稷),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도(道)를 학문의 방도로 삼고 노상직으로부터 경전(經典)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우고 학문의 길을 열었다. 또 곽종석에게 의기(義氣)를 전수, 조선총독부의 악행에 항거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상량문(上樑文)을 많이 지었다. 만년에는 초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저서로 24권 13책의 『성암집(誠庵集)』이 있다.

성기덕(溪庵 成耆德, 1884-1974)은 창녕읍 학산 마을에서 태어나 7세에 공부를 시작, 17세에 심재(深齊, 曺兢燮), 노소눌(盧小訥)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1920년 달성군 유가 본말리에 계암서당(溪庵書堂)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1931년에는 달성군 인근에 이애정(二愛亭)이란 정자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저서로는 『계암문집(溪庵文集)』 6권이 있다.

으로, 김재화(醇齋 金在華, 1887-1964)를 소개하겠다. 그는 청도 김 씨로 밀양 청도면 소태 출신이다. 고려의 10대 문장가로 많은 시문을 남긴 김지대(英憲公 金芝岱, 청도 김씨 시조)의 후손답게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필명을 남겼다. 그는 당대 최고 유학자인 심재(曺兢燮)의 제자로 감골재를 한달음에 넘어 소태(밀양 청도면)와 원촌리(창녕 고암면)를 오가며 수학했다. 또, 창강 김택영(金澤榮), 경재 이건승(李建昇) 등 기호지방의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숙부 김태린(小岡 金泰麟, 1869∼1927)에게 경서(經書)를 배웠고, 심재의 제자가 된 뒤에는 체계적인 학문과 문장을 익혔다. 성리학의 거두 곽종석(郭鍾錫)은 그에게 심재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 칭송하며 한산두(韓山斗)*라 불렀다. 저서로는 『속 오산지(續鰲山誌)』와 『정정 오산지(訂正鰲山誌)』가 있으며 그의 사후, 제자들에 의해 발행된 『순재 선생 문집(醇齋先生文集)』 13책도 남아 있다.

위에 거명한 대학자들 이외에도 학문을 숭상하고 문장에 탁월한 유학자들이 많이 계셨지만 일일이 거명하지 못한 점 널리 이해하기 바라며, 창녕문화원이나 인문학 연구소 등에서 이들의 업적을 발굴 고찰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계승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韓山斗 : 당나라의 8대 문장가 한유(韓兪,768-824)를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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