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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어머니 시론(詩論)
비사벌뉴스 | 승인 2022.08.23 17:08
이우걸 시인, 전 밀양시교육장/시조시인

1

오월이었을까? 남새밭에서 어머니는 상추를 뽑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가까이서 흰 나비를 쫓고 있었다.

쫓는다지만, 잡으려고 가까이 가면 나비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곤 했다.

푸른 하늘에는 엷은 구름들이 조금씩 무리지어 떠 있었다. 남새밭은 온갖 식물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식구들한테 반찬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어서 더 없이 소중한 땅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내가 뛰어다니다 이제 막 눈을 뜨는 어린 싹들을 밟을까봐 주의를 주시곤 했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 곁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바라보며 노는 것이 늘 좋았다. 그래도 배고픈 것만은 어쩔 수 없는 긴긴 봄날이었다.

2

나는 중농의 가정에서 1946년 4남4녀의 자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학을 하셔서 가끔 시를 지으시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한글 해독이 겨우 가능할 정도였지만 성품이 한없이 따뜻한 분이셨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 어머니의 부탁으로 형님들의 국어책에 있는 고시조를 붓글씨로 써서 드렸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칭찬하시고 신문지나 비료포대 종이에 모양 없이 쓰인 그 시조들을 신주 단지처럼 모아 두었다가 틈나는 대로 외우셨다. 형님들 말씀에 의하면 어머니께서 무언가 외우시기 시작한지는 1944년, 아버지께서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신 뒤부터라고 했다.

나와 여동생은 해방 후에 세 살 터울로 태어났다. 그러니 아버지가 일본에 가실 때 우리는 모두 6남매였다.

남편 없는 집에서 십여 마지기 전답을 가꾸어 아이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젊은 여인에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면 회심곡이나 불경, 혹은 가사나 시조를 외우시곤 했던 모양이다.

소리 내어 이런 글들을 외우면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있었고, 어떤 때는 오히려 힘이 났다고 어머니는 훗날 말씀해 주셨다.

그러니 어머니께 가사나 시조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 주는 한편, 그 고난을 딛고 다시 내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3

어머니의 간곡한 기도로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농사를 잘 짓지 못하시는 아버지는 가산을 늘리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형님들이 어머니와 같이 농사를 짓고 근검절약해서 우리 집은 조금씩 나아져 갔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는 식량 걱정이 없었고, 가끔 교과서 외의 책을 사 볼 수도 있었다.

내가 헌책 장사에게 사온 책은 모윤숙의 『렌의 애가』, 노천명의 『사슴』, 김춘수편의 『세계현대시 감상』, 한하운의 『보리피리』, 김소월의 『소월시집』 등이었다. 이런 책들을 읽다보니 나도 가끔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그 길이 바람직한 길이 아니라고 걱정하셨다.

그래서 한밤중, 나는 식구들이 다 잠이 들고 나서야 책을 읽고 글을 써 보곤 했다. 내가 아버지 몰래 책을 읽는 걸 아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미워하게 될까봐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네가 더 큰 사람이 되길 바라신다.”

“아버지는 너를 정말 사랑하신다.”

“세상에는 재미있고 유익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네 적성에 맞는 것을 고를 기회가 자꾸 생긴다.”

“우선 공부를 해야지.”

“아버지는 세상을 넓게 살펴본 분이다.” 등등 아버지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시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싫진 않았을 뿐더러, 글을 써서 살아갈 생각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글 쓰는 일은 가난한 가족을 돕는데 너무나 무력한 길이었다. 나는 결국 사회교육과를 선택해서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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