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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69회)낙동강, 소금 운반길 솔트로드(Salt Road)
비사벌뉴스 | 승인 2021.02.05 15:14
충북 괴산 소금배 목도백중놀이

소금 싣고 ‘오르락’ 곡물 싣고 ‘내리락’

해안-내륙을 잇는 문물소통(文物疏通) 길

소금의 역사

소금(salt)은 염화나트륨(NaCl)을 주성분으로 하는 짠맛의 물질이다. 식염(食鹽, table salt)이라고도 한다.

소금은 체액에 존재하며, 삼투압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므로 사람이나 짐승에게 중요하다.

바닷물의 약 3%가 염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닷물에서 구할 수 있다. 이는 천연적인 방법이지만, 인공으로도 생산할 수 있다.

소금은 소(牛)나 금(金)처럼 귀한 물건 또는 작은 금(小金)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자인 염(鹽)이라는 단어는 소금에 대한 국가의 재배를 뜻한다.

인류는 소금의 원천이 되는 장소나, 소금을 교역할 수 있는 장소 주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역사를 통틀어 소금의 이용이 문명의 주축이 되었다.

보수(報酬, 월급)의 영어 salary(샐러리)는 소금을 가리키는 라틴어 Sal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로마 군단들이 가끔 소금으로 보수를 받았기 때문으로, 금의 무게와 가치가 거의 같았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시대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에서 독점 판매하는 전매제(專賣制)를 운영했다.

조선시대는 소금을 생산하는 어민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고 자유로운 유통과 처분의 권한을 부여하는 사염제과 국가에서 직접 소금을 굽는 관염제를 병행하였다.

소금은 조선시대에는 배를 통해 강변 나루터로 운송하였다.

나루터에서 육로를 통해 보부상을 거쳐 소금장수들에 의해 깊은 산중오지까지 곳곳에 보급되었다.

낙동강, 나라의 간선 수운

낙동강 수운길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을 넘어 유사 이래 한반도의 간선 수운으로 겨레의 대동맥이었다. 이 뱃길은 조정에 바치는 조세미(租稅米), 강 하구 명지(鳴旨)와 녹산(菉山)의 소금, 멸치와 새우젓 그리고 각종 해산물들이 상류로 유통되었다.

또한 하류로 내륙지방의 산물인 곡물, 면화, 광석, 목기(木器) 등이 유통되었다.

낙동강 소금길 솔트로드(Salt Road)

강은 교통과 물류(물산교류) 길이다.

수많은 물산 중에 소금이 가장 중요했다.

낙동강은 해안의 소금이 내륙으로 이동하던 소금길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다.

살림집 부뚜막에는 소금이 있어야 한다. 소금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적한 산간마을이라도 소금이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금의 운반 경로(Salt Road)」를 추적하여 고대 인류의 이동과 교류를 규명하기도 한다.

낙동강은 영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었다. 아득한 고대부터 대한제국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소금은 대부분 낙동강 물길을 통해 공급됐다.

행인들을 태우는 나룻배

낙동강 하구 명지, 녹산의 바닷가에 있던 염좌(鹽座, 소금가마)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젓갈, 생선등)이 부산 구포 남창(南倉)나루터 물류창고로 들어왔다.

여러 배에 나누어 실고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삼랑진의 뒷기미 나루터를 거쳐 수산, 남지, 박진, 더 위로는 밤마리(栗旨), 현풍(玄風) 등지로, 또 상주 낙동나루와 안동까지 소금과 해산물을 팔았다. 그리고 현지에서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의 농산물과 바꾸어 싣고 내려왔다.

소금 배와 각종 어물을 실은 배들은 강가 장날에 맞추어 나루터 부근에 정박한다.

소금과 어산물을 팔고 내륙의 나락, 보리, 콩은 곡물과 면화, 광석, 목기, 죽기, 옹기, 한지 등을 사서 하류로 내려오며 판다.

나루터 장날의 풍경은 수많은 장꾼, 각처에서 온 보부상, 뱃사공 등이 어울리고 여각, 주막 등이 성황을 이룬다.

소금 배는 소금만 싣는 게 아니다. 사람도 타고 새 문물과 새 소식도 사람과 함께 이웃 고을로 전해진다.

강변 나루터는 세상물정을 잘 아는 요즘의 역세권 같은 곳이다.

​​낙동강의 고딧줄꾼, 강배 끄는 사람들

러시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강의 운하(運河) 기능은 물이 불어나는 여름 장마철부터 늦가을까지 주로 운행이 되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갈수기(渴水期)에는 강바닥이 드러나 배가 운행할 수 없었다.

갈수기는 물이 얕거나 화물을 과적했을 경우 배가 모래톱에 얹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좌초된 배를 옮겨주는 전문일꾼, 바로 고딧줄꾼이다.

고딧줄은 삼(麻)으로 엮어 만든 굵은 밧줄을 말한다.

또 배가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를 때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도 줄꾼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건장한 장정들로 양쪽 강둑에서 좌초된 배를 모래톱에서 끌어내는 인부들이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가 전해온다.

우두머리격인 도사공(都沙工)이 선창을 하고 고딧줄꾼들이 후렴을 반복했다고 한다.

고딧줄꾼들의 강배 끄는 소리,

가자가자 어서 가자, 어기여차 어기야(후렴)/ 남지들을 찾아간다(후렴)/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남지들을 들어서면/ 우리들 목적지/ 콩 팔러 어서가자/ 북풍한설 찬바람에/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발은 얼어빠지는 듯/ 저 사공아 닻을 잡고/ 동풍 오기 기다리자/ 어기여차 어기야...

일제 강점기 고딧줄꾼들이 경남 창녕군 남지를 향해 콩을 싣고자 거슬러 올라가면서 불렀었다. 남지는 인근에서 생산된 콩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이 그림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사실주의 그림을 많이 남긴 일리아 레핀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다.

그가 볼가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내륙 운송을 하는 배들은 강을 따라 하류로 갈 때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가면 되지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는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특히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는 예전에는 육지에서 줄을 메고 배를 끄는 일들이 있었다. 중국 장강(長江) 삼협 박물관에 가면 배를 끄는 사람들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수천년을 이어온 뱃길은 철길 개통과 함께 전기를 맞는다.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 그해 11월 마산선 개통과 함께 낙동강 수운의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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