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수필가, 방송인)

반 백 년도 더 지난 초등학교 6학년 국어시간에 배운 기행문을 떠올려 본다. 삼촌이 조카인 동명에게 보낸 편지 <남해에서>와 백제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썼다는 기행문 <고적을 더듬어>를 외우다시피 공부했던 옛 추억에 잠겨본다.

지난해에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뒤로하고 점, 점이 떠있는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며 통영에서 배를 타고 남해의 끝 섬 욕지도를 여행했다. 그 때 옛 기억을 더듬어 “동명아~”로 시작되는 첫 구절을 읊어 보았다.

동명아!
지금 아저씨는 유리알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배를 타고 간다.
배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비추며,
재빠르게 미끄러지듯 달린다. (하략)

또, 올 가을에는 코로나가 주춤한 사이를 틈타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를 여행하였다.

사통팔달로 쭉쭉 뻗은 도로를 달려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창과 방패를 들고 말을 타고 또는 걸어서 전장에 나갔던 신라와 백제 사람들을 생각하며 느릿느릿 천천히 가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단걸음에 다녀왔다. 남해고속도로, 통영-대전 고속도로와 국도를 따라 가는 길목마다 백제의 옛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계백장군이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운 황산벌을 지날 때는 숙연해지기도 했으며 논산과 연무대를 통과할 때는 피 끓던 청춘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에 임천향교 인근의 유바카 하우스에 도착했다. 주인장인 유박하 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모 일간지 <아무튼, 주말>에 소개된 걸 보고 찾아간 이곳은, 100년 된 낡은 집을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살짝 손만 본 상태다. 사워시설이 없어 불편했지만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 누워 잠을 청하며 집 생각하던 추억이 떠올랐다. 방바닥은 따뜻해 좋았지만 위풍이 심해 코는 시렸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주인장이 텃밭에서 정성스레 기른 갖가지 채소와 두부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도회지 사람이 시골에 들어와 살게 된 사연을 듣고 어린왕자가 되어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며 한국의 쌩떼지베리가 되었다는 가냘프지만 억척스런 여인의 휴먼스토리를 들을 때는, 나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겹겹이 쌓여 있는 낙엽을 밟으며 그녀가 들려주던 시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소풍 중 숲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고 있는데,

그 때 파란 하늘에서 구름 얼음을 깨고

하얀 낚싯줄이 내려와 저를 낚아가는.......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헛간을 개조해 만든 다이닝룸에서 유기농 천연재료로 지은 밥 디자이너 유바카 씨의 이색요리를 대접 받으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비(부여)는 위례(서울), 웅진(공주)에 이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 슬픈 역사가 숨어있는 곳이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사비성(泗沘城)으로 불렸다는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성이 그리 높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시원한 백마강(금강)을 굽어보며 나라를 잃은 설움을 한탄했을 백제인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성 안에는 군창터를 비롯한 삼국시대 건물터가 많은 걸로 봐서 유사시에는 방어 목적으로,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하며 왕과 귀족들이 유희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성이 함락되자, 3천 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낙화암에는 육각형 모양의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조선 중엽, 문인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쓴 현판이 세월을 거슬러 지키고 있었다. 절벽 아래는 고란사와 고란정이 바위틈에 자라는 고란초와 함께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1300여 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유적지를 답사한다는 건 의미가 컸지만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이라 아쉬움이 있었다. 일정 핑계를 대며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 군산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군산은 비록 치욕의 역사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국내최대 곡창지인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벼를 도정해 일본으로 보낸 곳이다. 지금도 신흥동 일대는 적산가옥(敵産家屋)이라 불리는 근대 일본식 집이 많다. 그 가운데 보존상태가 양호한 한 가옥을 찾아갔다. 일본가옥의 특징은 집안에 자연을 들여 놓은 것이다. 즉, 정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집도 예외가 아니다. 희귀 수목과 작은 연못이 분위기를 고조시켜 주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외부인의 접근을 알 수 있게 했다. 특이한 것은 1층 방바닥이 일본식 다다미가 아닌, 온돌로 되어 있었다. 조선온돌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적용했다.

한 때,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관청소유의 건물이나 시설을 모두 철거해, 지금은 개인 소유만 남아 있다. 이 집도 모 기업의 유산이라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군산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근현대가 상존하는 고즈넉하면서도 조용하고 여유 있는 정겨운 고장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초겨울이라 비를 맞고 걷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볼 것이 많이 있지만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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