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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 문화관광해설사의 숨은 문화재를 찾아서이방인(異邦人)의 꿈-창녕 계성면 계성리에 찾아온 백제 사람들
비사벌뉴스 | 승인 2020.06.29 10:05

이방인(異邦人)....

다를 異, 나라 邦, 사람 人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시기에 어떤 이유에서 고국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위험하고 험난한 머나먼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어떤 목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한 무리가 수레를 끌고, 등짐과 봇짐을 이고 지고 떠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을까...

지난 2006년 계성면 계성리 옛 여통산봉수(餘通山烽燧) 산자락에 위치하는 큰골 13동, 봉화골 12동, 모두 25동의 집터와 토기, 토기가마터등이 발굴되었다. 발굴된 백제계 토기는 4세기말~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무려 1,600년 전이다.

25가구는 1가구당 최소 5~6인 가족으로 잡으면 125~150명이다.

약 150여명 백제인들이 어떤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호남 서해안(무안 기준)에서 직선거리 180km가 넘는 먼 가야땅 계성까지 왔을까 ?

어떤 피치 못할 일이 있었던 것일까 ? 450리 길은 평화롭고 순탄하지만을 않았을 것이다. 밤낮을 쉬지 않고 강행군해도 열흘은 족히 걸렸을 먼 길이다. 목적지를 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칫 적군으로 오해되어 몰살 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였을 것이다.

1,600년 전 그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보고자 한다.

○ 계성현과 여통산봉수

여통산봉수 답사(2005년)

계성현은 남북으로 8km, 동서로 9km가 넘는 계성천 주변의 넓은 지역으로 고분을 남길만한 소국(小國)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경덕왕(757)때 계성으로 고쳐 고려시대를 거처 조선 태조3년(1394)에 영산현의 속현이 되었고 그 이후 기록은 없다. 최소한 637년 동안 존속된 오래된 고을임에 틀림없다.

가야소국이 있었고, 소국 명칭은 왕기음(왕가라, 감가라)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정복될 때 강력히 저항했던 곳에 향․소․부곡을 설치했다. 왕가라 멸망할 때 저항했던 유민들을 왕기음부곡(왕거, 왕거름)으로 유배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기음부곡이 위치한 장마면 초곡리는 사방이 유배지나 다름없는 깊은 골짜기다.

옛 장가면 초곡리에는 2곳의 옛 흔적이 있으니 곧 여통산봉수와 왕기음부곡이다.(창녕군지명사, P843)

봉오골(烽谷, 봉오골)은 여통산 봉수로 오르는 골짜기로 봉수막이 있어 봉수를 지키는 봉군(烽軍)들이 살았다고 전하며 7호가 있었는데 폐동되고 우물만 남아있다.(창녕군지명사, P724)

장마면 초곡리 왕거름과 계성면 계성리의 경계로 180m 산록에 있는 옛 계성 현에 있는데 영산현에서 14리 거리이다. 남쪽으로 영산현 봉산 소산봉수(봉산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창녕현 합산봉수(태백산봉수)에 응한다.

○ 4~5세기 삼국의 정세

4~5C는 고구려와 백재가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던 혼란기였다.

4C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백제의 근초고왕은 칠지도(4C 후반)를 만들어 왜에 하사한 시기이다.

 

4C 백제의 전성기

5C 고구려 전성기

6C 신라의 전성기

6C말~7C:삼국통일기

고구려+신라+전진

백제+왜+동진

고구려+남북조+북방민족

신라+백제+남조+왜

고구려+북조

신라+수

백제+남조(양)+왜

남북 세력↔동서 세력

고구려+백제+돌궐+왜

신라+수․당

4세기에 최전성기를 맞은 백제는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완전히 정복하여 호남 곡창지대를 차지한다. 그리고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중국의 요서, 산둥반도, 일본의 규슈진출(칠지도)등 국제교역의 중심국가로 성장했다.

침류왕 대에는 불교를 공인하였고,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으로 국력에 약해졌다.

비유왕대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자 위기를 느낀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은 나제동맹(433)을 맺는다.

개로왕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북위에 국서를 보내고 침략에 대비하는데 고구려의 침략(475)으로 위례성이 함락하고 개로왕이 전사한다. 이렇게 한성 백제시대가 끝나고 황급히 웅진(공주)으로 옮겨 위태롭게 웅진백제시대가 시작된다.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대에는 왕권의 약화로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나 동성왕은 국력을 회복하고 신라와 혼인동맹(493)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 이동(移動) 이유

호남서해안(무안 기준)과 창녕까지는 직선거리 180km(450리)가 넘는 거리다. 당시의 열악한 교통 환경으로 따져보면 험난한 육로보다 서해안을 내려와 남해를 거처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택했을 것이다.

백제유민이 정착한 여통산봉수 산자락의 큰골과 봉화 골은 옛 왕기음부곡이 있던 곳으로 긴 계곡과 산으로 가로막혀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마을 입지의 요새화, 짧은 거주기간, 집터 간 규모의 차, 왜계 유물의 보유 등으로 이들은 정치적 집단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호남 서해안에서 이렇게 먼 곳까지 이주를 하였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주하였다는 점이 이를 말한다.

이동의 첫째 한성백제 멸망 유민, 피난민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 공격(457년)으로 위례성(몽촌토성, 풍남토성)에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백제는 급히 웅진으로 천도한다. 한성백제가 멸망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피난길에 올랐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웅진(공주)으로 피신했으나 그 중 일부 백성이 육로나 수로를 통하여 머나먼 망명길에 올랐을 것이다.

당시의 가야는 친 백제 성향으로 백제의 피난민들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이고 창녕의 비화가야(당시 계성현 왕가라)에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정치적 망명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일족이 정치적 이유로 나라에 핍박을 당하여 망명을 강행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이동경로(移動徑路)

육로(陸路)로 이동했다고 가정하면 서해안 무안군 → 광주 → 구례곡성 → 남원 → 함양군 → 합천군 → 창녕 비화가야(왕가라)로 왔을 것이나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다.

배를 이용한 수로(水路)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 서해안 뱃길 → 낙동강 하류 → 계성천 → 창녕 비화가야(왕가라)로 설정해 볼 수 있다.

창녕군은 낙동강 중류 물길의 중심지라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이며, 전략적 요충지로 고구려, 신라, 백제, 왜, 그리고 여타 가야유물들이 출토된다. 많은 문화가 섞이며 융합되는 지역이다.

1,600년 전에 창녕에 왔던 그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 혹시 내 이웃 아니면 나의 선조는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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