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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은 문화재를 찾아서-다대포첨사 윤흥신임진왜란 첫 승을 거둔 다대진성 윤흥신장군-상
비사벌뉴스 | 승인 2020.05.07 13:30

임란순절다대포첨사파평윤공흥신제단비(壬亂殉節多大浦僉使坡平尹公諱興信祭壇碑)

누구의 삶인들 소설 아닌 인생이 있을까. 어떤 삶은 장편, 또 어떤 삶은 단편이 되기도 한다. 정치인과 큰 기업인의 삶은 대하소설로 되기도 한다.

그러니 “내 인생은 시련으로 점철된 한편의 소설이다”라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기구하고 고달프다 슬퍼할 필요는 없다. 누군들 소설 아닌 인생이 없으니 말이다.

여기 파란만장한 삶이란 말이 무색한 극적인 삶을 살다간 비운의 윤흥신(尹興信, ?~1592))이란 역사적 인물이 있다.

그는 조선 13대 임금 명종(1545년∼1567년) 때 명문가 대윤 윤임(大尹 尹任)의 아들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로 가문의 몰락과 함께 나이가 어려 죽음을 면하고 관노비(官奴婢)로 전락한다. 선조 때 복권되어 진천현감으로 부임하여 글을 읽지 못한다고 파면되었다. 관노로 살며 글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1590년 유성룡의 천거로 다대포첨사로 발탁되어 무인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2년 뒤 1592. 4.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의 1차 공격을 막아내고 2차 공격 때 중과부적으로 끝내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 그가 바로 윤흥신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떤 글과 말로도 표현이 부족하다.

3년 전 어느 날 임진왜란 때 영산현에서 의병활동을 한 신갑(辛石甲)의병장 묘소를 찾아 장마면 초곡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입구 오른쪽 언덕위에 서있는 비석에 본능적으로 눈길이 갔다.

찬찬히 살펴보니「壬亂殉節多大浦僉使坡平尹公諱興信祭壇碑」로된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부산이 아닌 창녕에서 윤흥신장군의 흔적을 발견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제단비가 어떻게 여기에 서 있는가 ??

이순신장군 연구․답사 단체「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에서 2016년 답사한 부산 사하구 다대포 윤공단(尹公壇)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역사적 인물보다 파란만장하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도 비운의 삶을 살다간 윤흥신장군의 유적을 보며 많은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윤임의 아들로 태어나 금수저로 살다 울사사화로 가문이 멸문되며 관노로 끌려가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 후 선조 때 신원되어 진천현감으로 부임했으나 글을 읽지 못해 파직되었다. 1590년 왜와 전운이 감돌자 유성룡의 천거로 다대포첨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2년만인 1592. 4.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다대포성을 사수하다 장렬히 순절한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이 또 어디 있던가 ?

부산지역에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장군, 다대포 첨사 윤흥신장군등 세 명의 영웅이 있다. 세분의 동상이 시내에 세워져 숭고한 희생을 하신 뜻을 기리고 있다.

다대포에는 두 분의 영웅이 모셔져 있다. 한분은 다대포진 첨사 윤흥신 공이다. 또 한분은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장군이다.

그 중에 윤흥신장군의 다대포 전투를 「다대포를 구슬피 떠도는 임란진혼곡(김영찬 작)」이란 제목으로 2007년 소설로 출간되었다.

10년 뒤인 2017년에는 부산 사하구 을숙도문화회관에서 「파란만장 다대첨사 윤흥신」창작 오페라가 공연되기도 했다.

윤흥신장군 석상

○ 윤흥신의 가문의 몰락

대윤(大尹) 윤임과 소윤(小尹) 윤형원의 권력투쟁

아버지 윤임(尹任, 1487.7.26~1545.8.30)은 인종의 외척이자 대윤의 거두로 소윤(小尹)과 대립하다가 을사사화 때 화를 당했다. 중종의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1523년(중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직 중 왜구의 전선(戰船)을 맞아 싸우다 패하여 충군(充軍, 조선시대 죄를 범한 자를 군역에 복무하도록 한 형벌)되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을 낳아 왕위계승의 문제가 발생하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주장하여 문정왕후측과 대립했다.

김안로가 사사되면서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집권하자, 대윤 일파를 이끌며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와 대립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찬성에 올라 윤원로·윤원형을 파직시켰으나, 이듬해 7월 인종이 경원대군에게 전위하고 죽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윤원로가 "윤임이 임금을 해하려 한다"고 고변했으나, 오히려 윤인경(尹仁鏡) 등의 탄핵을 받아 해남에 유배되어 윤임은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윤원형이 첩 난정(蘭貞)을 통해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조카인 봉성군(鳳成君)을 왕에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고, "인종이 죽을 당시에 윤임이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그해 8월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나 멸문의 화를 당했다.

그는 남해로 귀양 가던 도중 충주에서 사사되었다. 두 아들은 죽고 윤흥신은 나이가 어려 살아남아 관노비가 되었다. 32년 후인 1577년(선조 10) 세 아들과 함께 신원되었다. 윤흥신만 살아남아 복권된 것이다.

금수저 윤흥신의 태어난 년도를 모르는 것은 을사사화 때문으로 추정된다.

○ 다대포진성(多大浦鎭城)과 첨사 윤흥신장군(僉使 尹興信將軍)

다대포진성은 1490년(성종21) 11월에 둘레 1,806척, 높이 16척의 석성을 쌓았다. 그 뒤 다대포진성은은 만호영(萬戶營)에서 첨사영(僉使營)으로 승격되었다.

윤흥신장군은 임진왜란 직전 침략의 징후가 감돌던 1590년 다대포 첨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대포진성에서 항전하다 성이 함락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다대포 전투(多大浦戰鬪)-다대진성 전투(多大浦鎭城戰鬪)

시기

1592년 5월 24일 ~ 25일(음력 4월 14일 ~ 15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 다대포

원인

부산진 함락 후 일본의 다대포 진공.

교전국

조선

왜(일본)

지휘관

윤흥신
윤흥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

약 800 명

18,700 명

피해

방어군 전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일본군의 다대포진성 함락, 이후 동래성 전투 발발.

4월 13일 쓰시마 섬에서 절영도(현 영도) 앞바다까지 도착한 왜군은 4월 14일 새벽 부산포진성과 다대포진성을 동시에 공격한다.

부산포진성 정발장군(鄭撥將軍)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며 순절한다.

1차 전투(4월 14일)

1차 전투는 군관민이 윤흥신장군의 지휘 아래 결사항전으로 적을 물리친다.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2차 전투(4월 15일)

다음날 왜군은 군사를 대폭 증원하여 파죽지세로 공격한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윤흥신 장군은 장렬하게 전사한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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