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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삶과 역사정 위상고려대학교 김창현교수 著
비사벌뉴스 | 승인 2019.08.01 09:22

5월 갑술일(17일)에 久旱으로 인해 刑人推整都監을 설치해 寃抑을 按雪했다. 5월 경진일(23일)에 찬성사 李龜壽를 會原에, 評理梁伯益을 春州에, 判密直司事朴椿을 光陽에, 芮城君石文成을 長岩에, 宦者晉原府院君金壽萬을 利川에, 府院君李寧을 沃州에 유배하고 모두 그 家를 적몰했고, 柳濯과 李仁任에게 명해 都堂에서 庶政을 관장하고, 金蘭과 任君輔와 睦仁吉에게 명해 宮中에서 庶務를 관장하도록 했다. 6월 경인일(3일)에 李公遂로 益山府院君을, 慶千興으로 淸原府院君을 삼았다.

경천흥과 최영의 이 사냥에 대해 史臣安仲溫은 말하기를, 때가 바야흐로 旱蝗하고 또한 지진이 발생했는데 경천흥과 최영이 碩輔로서 燮理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사냥을 일삼았으니 辛旽讒構의 禍를 초래한 것이 불행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하니 경천흥과 최영이 실각한 이유에는 그들의 사냥이 자연재해 때였던 점이 작용했다. 그런데 경천흥과 최영이 실각한 직접적인, 표면적인 이유는 공민왕이 언급했듯이 왜구가 개경 일대를 위협할 때 사적으로 사냥한 일 때문이었다. 또한 최영의 폄출과정에 편조 즉 신돈이 개입했다. 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C-1. (공민왕 14년 5월에) ‘妖僧’ 遍照가 崔瑩을 참소해 雞林尹으로 폄출하다. 편조가 때에 密直金蘭의 집에 머물렀는데 김란이 二處女로 視寢하게

하니 최영이 김란을 질책하자 편조가 최영을 질시했다. 최영이 出臘하자(편조가) 드디어 최영을 참소하니, 왕이 判開城府事李珣을 보내 최영을 꾸짖기를, “卿은 東西江都指揮使가 되었지만 倭가 昌陵에 들어와 世祖眞을 취했는데도 알지 못하니 金續命으로 卿을 대신하게 했건만, 卿은 軍을 김속명에게 주지 않고 그 병력을 거느려 無時로 田獵했으니 무슨 때문인가, 비록 내가 말하지 않아도 臺諫이 卿을 용서할 것인가, 지금 卿으로 雞林尹을 삼으니 급히 부임하라”라고 했다.(고려사절요권28)

C-2. (공민왕) 14년에 倭가 喬桐과 江華를 침략했는데, 崔瑩이 東西江都指揮使로 병력을 거느리고 東江에 鎭하고 있었다. 최영이 일찍이 密直金蘭이 女를 辛旽에게 與한 것을 질책하니 신돈이 최영을 질시했다. 이에 이르러 최영이 高峯縣에서 사냥하자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니 왕이 李珣을 보내 꾸짖기를, “倭가 昌陵에 들어와 世祖眞을 취했는데 卿은 東西江都指揮使이면서 알지 못하니 金續命으로 卿을 대신했는데 卿은 오히려 그 병력을 거느리고 無時로 사냥하니 무엇 때문인가.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臺諫이 논하지 않으리오. 지금 卿으로 鷄林尹을 삼으니 빨리 부임하라”라고 했다.(고려사 권113, 崔瑩傳)

C-3. (공민왕) 14년에 신돈이 密直金蘭의 집에 머물자 김란이 二處女를 與했다. 崔瑩이 김란을 질책하니 신돈이 최영을 질시해 참소해 雞林尹으로 폄출하고 또한 贊成事李仁復, 密直趙希古洪師範崔孟孫등을 파직하고 사이가 좋은 김란 및 金普李春富任君輔朴曦를 끌어다가 그들을대신하게 했다.(고려사권132, 신돈전)

편조(신돈)가 金蘭의 집에 머물 때, 고려사절요는 김란이 딸로 하여금 편조에게 ‘視寢’하게 하자, 고려사 최영전은 김란이 딸을 與하자, 최영이 이를 질책하니 편조가 최영을 질시하다가, 최영이 사냥하자 신돈이 최영을 참소했다고 되어 있다. 반면 고려사 신돈전에는 김란이 二處女를 與하자 최영이 김란을 질책하니 신돈이 최영을 질시해 참소해 계림윤으로 폄출되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신돈전은 신돈이 최영을 참소해 폄출시킨 것이 신돈에게 與된 김란의 딸 때문으로 보이도록 교묘하게 자료를 배치하고 폄출의 핵심요인인 최영의 사냥 문제를 빼 버렸다.

고려사절요에는 김란이 딸로 하여금 편조에게 視寢하도록 한 것으로, 고려사 신돈전과 최영전은 김란이 딸을 與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신돈전은 더 나아가 신돈이 初에 僧行으로 왕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이미 金蘭의 딸을 納하고 또 셀 수 없이 畜妾하고 卿大夫妻중에 貌美者는 반드시 비밀리에 불러 私했다고 기재했다. 과연 이것을 그대로 믿어야할지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視寢은 원래 問安視寢의 의미로 侍寢 혹은 薦枕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에 기재했듯이 원래 視寢이었는데 신돈전과 최영전으로 가면서 ‘與’로 변질되고 신돈전에는 더나아가 신돈이 김란의 딸을 納"한 것으로 부연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말기 상황에서 신돈이 환속한 이후에는 처첩을 두어도 남의 처첩을 건드리지 않는 한 그리 문제될 사안은 아니었지만 신돈이 욕정의 화신처럼 묘사되었으니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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