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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江, 그리고 昌寧의 물길-Ⅵ - 경양대, 웃개장터, 반구정유허비(伴鷗亭遺址碑)
비사벌뉴스 | 승인 2019.05.10 10:35

우리나라 큰 강은 한반도의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적 영향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에 이른다. 압록강, 대동강, 한강, 영산강이 그렇다.

그러나 낙동강과 섬진강은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 남지에서 동으로 꺾어져 밀양, 김해, 양산, 부산을 거처 남해로 흘러든다.

강줄기는 원래 함안을 관통하여 진동으로 흘러야 하지만 용하산에 막혀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간다.

강물의 힘에 깎인 용화산 하식애(河蝕崖)는 병풍 같은 절벽을 만들어 푸른 강물에 투영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든다.

푸른 강물과 병풍 같은 절벽, 반대편에 만들어진 넓고 하얀 모래백사장은 시심(詩心)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남강이 합류하는 합강정에서 망우정까지는 낙동강 700리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다.

이 구간에서 조선 영남사림 선비들은 뱃놀이(船遊)를 즐겼다.

불치불검(不侈不儉),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도 않는 수수함을 말한다. 선유는 선비들이 학통(學統)을 확인하고 친목을 다지며 시문을 짓는 불치불검 정신을 철저히 지켰다.

1607년(선조 40) 한강 정구, 망우당 곽재우등 35명의 선비들이 행한 용화산 선유, 1618년(광해군 9) 한강 정구선생이 부산 동래온천에 요양가면서 행한 봉산욕행 선유, 1628년(인조 6) 이익지, 유회보등의 경양대선유 등이 있다.

남명과 퇴계의 학풍을 집대성한 한강 정구선생이 망우당과 경양대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은 유서 깊은 곳이다.

정구선생께서 말년에 칠원 내내촌(현 칠서면 계내리)의 처사 주익창(周益昌, 주세붕의 손자)이 살았던 옛터에 이사와 살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창녕과 함안현감 재임 시 수많은 선비들과 교류했으며 선유했던 추억이 서린 장소이기에 마음을 먹었던 것이리라. 욕심 같아서 그 때 이사와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외 용화산은 용주사(龍珠寺, 현 능가사), 옛 청송사(靑松寺), 옛 홍포서원(鴻浦書院), 옛 상봉정(翔鳳亭), 내내 은행나무, 노아의 전설등 수많은 시간이 쌓여있는 서기(瑞氣) 어린 땅이다.

경양대(景釀臺)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진동 마을에서 낙동강 서쪽 강변으로 기암절벽이 우뚝 솟아 있다. 이곳을 경양대(景釀臺) 또는 지암담(地岩潭)이라 부른다.

절벽 밑 물깊이가 명주실 한 타래가 다 풀릴 정도였다 한다. 바위 모양이 가위와 같아 귀퉁이에 물이 고여 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이곳을 뛰어 넘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 솟은 절벽과 푸른 강물, 아름다운 백사장이 어우러진 경치가 누룩이 술을 빚어낸 것(釀)과 같다 하여 경양(景釀)이라 했다. 멋진 풍경(景)과 좋은 술(釀)은 예나 지금이나 멋진 궁합이다.

<동국여지승람> 칠원 편에 "벼랑에 우뚝한 바위가 위는 평탄하여 손바닥 같은데 10명 남짓 앉을 만하다. 이인로(李仁老)가 일찍이 여기서 놀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인로(1152~1220)는 900여 년 전 고려 사람이니 경양대는 일찍부터 유명했던 모양이다. 이인로는 시와 술을 좋아했던 인물이니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낙동강을 통틀어 풍경이 뛰어나 이름난 곳이 한 둘이 아니지만, 시인묵객ㆍ벼슬아치ㆍ유람하는 선비들은 최고로 여겼다 한다.

풍류를 즐기면서 월주(月株, 강물에 비치는 달기둥)를 감상하며 시(詩)를 읊던 장소였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살았던 예문관대제학 이첨(1345~1405)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긴 강이 동쪽을 향해 졸졸 흐르는데

들은 넓고 산은 열려 하늘 끝까지로다.

배와 상앗대는 몇 해나 사람을 건너 주었는가

풍진 만리길에 객은 누에 올랐도다

연기는 두자(杜子)가 진회(秦淮)에서 보낸 밤에 서렸을 때와 같고

달은 동파(東坡)가 적벽(赤璧)에서 보낸 가을처럼 작네

갈림길은 남쪽으로 큰 진(鎭)에 통하니

나그네의 말은 매양 여기에 와서 머문다.

같은 예문관대제학 외교문서에 능통했던 변계량(1369, 공민왕18~1430, 세종 12)도 여기서 시문을 짓고 노닐었다니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경양대 상류 합강정을 짓고 살았던 조선 선비 간송 조임도(1585~1664)선생도 글을 남겼다.
「물결이 잠잠하고 바람이 멈추면 온갖 산이 거꾸로 비치고, 고요한 밤에 강이 텅 비면 달과 별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당대 최고 석학들이 앞 다투어 찾아 시문(詩文)을 짓고 풍류(風流)를 즐긴 곳...

그러나 무심한 강물은 흐르고 흘러 옛님들은 가고, 이제 아카시, 참나무 등수풀이 무성하고 옛 선비들의 자취는 흔적마저 희미해졌다. 얼마 전 답사때 이인로선생이 좋아했던 맑은 술 한잔 올렸다. 함안군은 읍에서 멀어 그런지 무심하다.

어쩌면 매일 마주하는 남지사람들이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 강 건너는 남지생활권이기 때문이다. 저 적벽위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떤 선비의 옷자락이 스쳐갔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웃개장터, 반구정유허비(伴鷗亭遺址碑)

경양대옆 강변 넓은 공터 모래톱은 예전에 칠원 웃개장이 서던 장터다.

웃개는 지금의 남지읍 남지리 주변 강가의 지명으로 우질포, 상포로도 불렸다. 웃개장은 예전부터 상․하류의 많은 물류가 거래되던 규모가 큰 장이었다. 크고 작은 수많은 배가 소금, 젓갈, 생선 등을 싣고 오르내려 웃개나루는 크게 번창했다. 선창가의 객주집이 수십 개가 늘어서 있었고, 마방(馬房)도 여럿 있었다 한다. 우여곡절 끝에 웃개장은 강 건너 남지로 옮겨가게 되는데 그 이후 남지가 번창하게 되었다.

장터에서 주세붕선생 묘역이 멀지 않는데, 작고 완만한 고개가 장을 넘나들고 하여 장고개다.

웃개장 근처에 말 바위 일명 두암(斗巖)이라는 널찍한 바위가 있다. 임진왜란 의병장 두암 조방선생이 갈매기와 더불어 노닌다는 반구정(伴鷗亭)을 짓고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강 건너 오리 떨어진 곳에 의병장 곽재우선생이 망우정을 짓고 은거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생사를 같이한 전우이자 모시던 장군이었으며 성리학을 한 선비로 교류한 사이다.

수시로 조각배 띄워 술을 실고 건너갔다.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살이와 나라 걱정에 세월을 보냈으리라.

예전에는 남지 사람들(옛 영산현 도사면)은 눈앞 강 건너편도 남지 땅이라고 생각 했던 것 같다. 강건너 합강정, 경양대, 반구정은 사실상 남지생활권이다. 지금은 함안땅이라 정비하고 복원은 그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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