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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삶과 역사적 위상(6편)고려대학교 김창현 교수 著
비사벌뉴스 | 승인 2019.04.25 09:48

원의 충혜왕 납치에 고용보, 신예, 기철이 元使와 더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었다. 고려사 辛裔傳과 고려사절요에는 元使朶赤과 乃住가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신예가 그 妹壻고용보와 모의해 伏兵해 禦外하여 도왔다고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해 고려사절요에는 史臣元松壽가 말하기를, “왕이 비록 凶虐하나 그 主인데 고용보는 小人이라 논할만하지 않지만 辛裔는 儒者인데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했다. 고려사 辛裔傳에도 같은 비판이 실려 있는데 원송수가 아니라 ‘時人’이라 기재했으니 그러한 비판이 마치 당시의 여론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김륜, 이제현 등은 이러한 사건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이전에 정동행성 員外신예가 원으로 갈 때 전별 글을 써주지 않았을 것이다.

신예가 일찍이 元의 명령을 받아 楡岾都監을 주관했다. 당시 姜居正과尹衡이 有備倉~의 관원으로서 충혜왕의 명령을 받들어 寺院田을 몰수했는데 楡岾田즉 楡岾寺의 田도 역시 몰수당했다. 楡岾都監이 有備倉에 牒하여 田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강거정 등이 말하기를 寺田은 일찍이 왕명으로 本倉에 속하게 한 것이니 마음대로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유점도감이 신예에게 호소하자 신예가 강거정 등을 잡아 聖旨거부로 取辭했는데 尹衡은 승복했지만 姜居正은 끝내 굽히니 않았다. 이에 신예가 더욱 노해 강거정을 行省獄에 가두었다.

신예가 유점도감을 주관해 금강산 유점사를 관리 내지 후원했던 것인데, 혹시 친족인 편조(신돈)를 유점도감에 근무시키거나 금강산 사원에 두지 않았을까? 편조를 유점사에 머물게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훗날 신돈이 집권했을 때 공민왕으로 하여금 평양, 금강산, 충주로 巡駐하도록 시도한다. 공민왕 18년 11월에 신돈이 高仁器의 머리를 깎아 금강산으로 추방한다. 고인기는 본래 僧釋溫으로 辛丑戰功으로 인해 輔理君에 책봉되었지만 죄를 입어 도망해 머리를 길러 성명을 高仁器로 바꾸었는데 신돈에 아부해 判少府監事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신돈의 逆謀를 누설하니 신돈이 왕에게 自辨하고 그를 머리 깎아 내쫓은 것이라 하며 사실은 그를 庇(陰護)한 것이라고 한다.

이로 보아 신돈이 금강산 내지 그곳 사원과 관련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금강산은 반야의 상징인 담무갈보살과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의 주처로 인식되어 신돈의 문수신앙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었고, 충주는 신돈의 근거지인 경상도의 관문이었다. 신돈의 평양 금강산 충주 경영론은 보우의 한양 천도론에 대적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영전 사업에 몰두한데다가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제대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충혜왕 5년(충목왕 즉위년) 4월에 上洛君金永暾이 闕庭에 나아갔는데 辛裔와 盧英瑞가 紫靴를 신고 㮨帽를 쓰고 門內에서 胡床에 걸터앉아 내려다보며 禮를 행하지 않았다. 김영돈이 앞으로 불러 말하기를, 公들은 어찌 前代惡小의 奢靡冠服을 혁파하지 않는 것이오 하니 노영서 등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고 한다. 元子昕(충목왕)이 入元해 宿衛하고있었는데 충혜왕 5년(충목왕 즉위년) 2월 정미일에 고용보가 8살의 어린왕(원자)을 안고 황제(순제)에게 보였다. 황제가 어린 왕에게 부친(충혜)과 모친(덕녕공주) 중에 누구를 배우려는가 묻자 모친 배우기를 원한다고 답하니, 황제가 襲位하도록 했다. 충목왕이 즉위년 5월에 고용보에게 十二字功臣號를 하사했다. 고용보가 충목왕 즉위에 공로를 세워권세가 더욱 하늘을 찔렀으니 신예의 권세도 더욱 커졌다.

충목왕 즉위년 6월에 書筵을 설치했는데 서연관에 前僉議叅理辛裔도 포함되었다. 충목왕 원년 1월 정미일(22일)에 정방을 다시 설치해 찬성사 朴忠佐와 金永煦, 叅理(評理) 辛裔, 知申事李公遂로 提調官을 삼았으니, 신예가 인사권을 장악했다. 初에 陜州吏李績이 避役해 鷲城君辛裔에 의탁해 求官하니 신예가 다른 사람의 관직을 빼앗아 그에게 주자 失官者가 監察司에 호소했다. 감찰사가 李績을 가두자 신예가 감찰대부 李公遂를 罵辱하고 한 중랑장으로 하여금 掌令宋球를 잡아오게 했는데 잡아오지 못했다. 신예가 노하여 그 동생 辛貴를 시켜 구타했는데 대개 그 妹壻고용보의 권세에 기댄 것이었다고 한다.

至正6년(충목왕 2) 봄에 資正院使姜金剛과 左藏庫副使辛裔가 천자의 명령을 받들고 金幣를 가지고 와서 금강산에 鐘을 주조해 완성하고 개경에 들르자 국왕(충목)과 공주(덕녕공주)의 부탁을 받아 演福寺(普濟寺) 종을 만들어 완성했고 이곡이 왕명을 받아 병술년(충목왕 2) 6월 旣望에 鐘銘을 찬술했다. 여기에는 이와 관련된 인물들이 기재되었는데 고려국왕 王昕(충목)과 德寧公主亦憐眞班의 바로 다음에 資善大夫資正院使姜金剛과 將仕郞左藏庫副使辛裔가 자리했다. 신예가 띤 左藏庫副使는 원의 관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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