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체육
辛旽의 개혁 왜, 실패하였나?
비사벌뉴스 | 승인 2019.04.22 07:59

14세기 말은 고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유럽의 경우는 1천년 이상 神權統治로 암울한 세월을 보냈던 중세가 서서히 물러가고 文藝復興(Renaissance)이 시작되었고,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中華文化圈을 형성하던 宋나라는 이민족인 몽고족(元)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숨죽여 지내다가 朱元璋의 결기로 明을 건국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元末明初, 두 나라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치며 눈치봐야했던 고려로서는 명석한 리더를 필요로 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辛旽이다.

신돈은 1358년, 개혁 군주 공민왕을 만나 의기투합 한 뒤, 왕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개혁의 의지를 보였지만 실패하고 반역자가 되어 목숨까지 잃는다.  그리고 그의 개혁 실패가 단초가 되어 고려 패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공민왕과 신돈의 만남

신돈은 계성현감 신원경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옥천사 여종이어서 승려가 되었으나 산방에서 외롭게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장성해서는 시체를 거두고 묻어주는 매골승으로 지냈다. 외롭고 험한 일을 하면서 민초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 귀족의 후원으로 호화롭게 지내며 신분차별을 자행하던 다른 승려들과 달리 천출인 신돈은 신도들을 대할 때 귀천이나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를 神僧이라 부르고 문수보살이 살아 돌아왔다고 좋아했다. 그런 신돈을 김원명이 공민왕에게 소개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신돈에게 감화를 받은 공민왕은 불교는 물론, 정치 분야의 자문까지 구하며 현화사(개경) 주지로 임명하고, 보우의 후임으로 왕사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반발 또한 컸다. 왕사에서 쫓겨난 보우가 친척인 태후 홍 씨에게 그를 폄훼하였고, 개혁을 주도하다가 밀려난 이제현도 신돈을 멀리할 것을 간청했다. 홍건적을 물리치고 기세가 등등한 정세운이 그를 죽이려하자, 왕이 직접 나서서 피신을 시키기도 했다. 

13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왕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신돈뿐이었다.

따라서 신돈이 자연스럽게 권력의 핵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1365년 5월 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임명하고 자문을 구했다. 공민왕은 권문세족들은 서로 무리를 지어 감싸고, 신진들은 명문가문과 혼인을 맺으면서 초심을 잃게 되고 새로운 권문세가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힘없는 유생들마저 힘의 결집을 위해 친소관계에 따라 파당을 만들어 뭉쳤다. 따라서 왕은 보살펴줄 친인척과 私利私慾이 없는 신돈이 개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1365년 12월, 신돈은 ‘영도첨의사사’라는 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 경험이 없는 승려가 宰相에 오른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왕은 특정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신돈이 국정개혁을 잘 수행할 것이라 믿었다.

세력이 없는 신돈은 왕의 신뢰마저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왕의 다짐을 받아내었다. “대사는 나를 구하고, 나는 대사를 구할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부처와 하늘에 맹세하겠다.” 라고 약속했다. 따라서 신돈은 인사권을 포함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먼저 형인추정도감을 설치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누명을 쓴 사람을 조사해 구제하고 권문세족들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돌려주고 나라 살림도 튼튼히 하고자 했다. 

1366년, 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본격적인 개혁을 주도했다.  토지를 되찾은 백성들과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그를 聖人이라 칭송했다. 신돈에 비판적인 『고려사』에서 조차 ‘온 나라가 기뻐하였다.’고 적고 있다. 신돈의 개혁은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땅과 노비를 환수 당한 귀족들의 반발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게다가 西京遷都 설을 주장하며 개경을 떠날 것을 건의하자 귀족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1367년 成均館을 중건하고 개혁 성향이 강한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고 그의 제자인 정몽주, 정도전을 관직에 진출시켰다. 신돈이 집권기에 이들 新進士大夫들이 대거 육성하고 출사시켰으나, 대부분이 불교국인 고려를 등지고 유교국가인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으로 말을 바꿔 탔다. 신진사대부들은 신돈의 도움을 받고 출세는 했지만 정작 그의 힘은 되어 주지 못했다. 그들 스스로 힘이 미약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미래의 귀족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고향 경상도 사람들을 중용해 중앙 귀족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사기도 했다.(성여완, 성석린, 성준덕, 조민수, 조취기 등이 창녕 출신임)

 공민왕의 변심

1369년, 신돈은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사심관 제도의 부활과 충주천도를 건의했지만 무산되었다. 신돈의 권력이 막강해지는 것에 대한 왕의 부담도 컸다

왕과 신돈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역린(逆鱗)이다.

왕은 노국공주를 위한 영전(影殿)과 무덤 공사에 많은 재정을 투입했다. 유모와 모후인 명덕태후까지 직접 나서 공사 중지를 요청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마침내 신돈이 공사 중지를 건의해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공민왕은 왕비가 죽은 뒤, 정치는 뒷전이었고 자신은 왕비 추모 토목공사와 불공 그리고 유희로 세월을 보냈다. 추모사업 방해 이유로 신돈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직접 국정을 살폈다.

1370년 7월, 승려를 총괄하는 제조승록사사 책임자로 승려 혜근을 임명해 신돈이 가지고 있던 불교계의 인사권마저 박탈했다. 그리고 10월에는 형인추정도감의 기능이 유명무실하다며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1371년 7월 신돈은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신돈의 개혁 실패 이유와 과제

 『고려사』 반역열전 신돈편에는 “호색 음탕한 요승”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의 당위성 때문일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은데다, 심한 왜곡으로 인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인사권을 장악한 신돈이 새 인물 찾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린다고, 현실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정치낭인들이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玉石을 가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특히, 그의 친척 신예의 처족인 이인임은 개혁의 대상이었지, 개혁을 주도할 인물은 아니었지만 전민변정도감 판사로 기용해 권력을 휘두르게 했다. 이인임은 賣官賣職과 토지, 노비를 강탈하는 등 탐욕을 일삼은 대표적인 부정축재자이다. 그리고 신돈이 키운 유생들도 그를 비판하고 업신여겼다. 충분한 지지세력 없이 왕의 신뢰만 믿고 電光石火처럼 인사와 개혁을 주도했던 게 오히려 화근이 된 것이다.

신돈은 정치에는 門外漢이었다. 특히, 공민왕의 의중과 用人術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魯國大長公主가 죽은 후 나락으로 떨어져 방탕생활을 일삼으며, 의심 병까지 생겨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신돈은 권문세족들의 모함이나 반발을 일체 무시하고 좌천시키거나 유배 보내는 것으로 억압하려고만 했지, 그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관용과 배려, 리더십이 부족했다.

신돈은 왕의 신뢰와 백성의 지지는 얻었지만 미래 비전은 제시하지 못했다. 몽골의 쇠퇴와 신흥 강국 明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했고 국제질서 변화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또한, 고려가 취해야할 입장도 견지하지 못했다. 만약, 그때 신돈이 개혁의 당위성을 귀족들에게 설득하고 이해를 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정치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경험이 부족하고 위기 대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의감만으로는 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 반대파 제압을 위해 단시간에 힘의 결집을 이루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득권자들의 마음을 사지 못한 게 실패의 원인이다. 백성들은 그를 성인으로 추앙했지만, 개혁의 대상까지 포용하고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더라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겠냐하는 아쉬움이 있다. 반대파를 전쟁장관에 기용했던 링컨의 리더십이 생각나는 대목이고 오바마의 담대한 용기가 생각난다.

결국 신돈은 미완의 개혁자로 남게 되었지만, 그의 개혁의지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科田法의 실시(1391년)로 이어졌고 정도전에 의해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하였다.

우리의 과제

신돈이 나고 자란 玉泉寺址를 발굴, 복원하여 유물과 유적을 전시하고 스님의 개혁의지를 주지시키고 현시대에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돈재단을 설립하여 자치단체와 언론사 등과 연계해 학술회를 개최하고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관광객이 찾아오게 해야 한다. 그밖에 신돈 길을 조성해 우포늪과 부곡온천 등과 연계하는 테마관광 상품을 만들어 외지인들이 방문하고 싶은 고장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강사 소개

김영일(대지면 출신) 言論人, 史學者, 隨筆家

前 MBC 기자, KNN 보도국장, 상무이사, 시청자미디어재단 원장

부산외국어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비사벌뉴스  bsb2718@hanmail.net

<저작권자 © 비사벌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비사벌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신문사소개고충처리제도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인터넷신문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만길 18  |  대표전화 : 055)532-0505  |  팩스: 055)532-0473
사업자등록번호 : 608-81-87983  |  등록번호 : 경남 아02351  |  등록일자 : 2015. 7. 2 (최초발행일자 : 2015. 7. 2)  |  발행일자 : 2017. 7. 24
발행인 : 조지영  |  편집인 : 오종식  |  청소년보호책임자 : 오종식
편집부 : 055)532-0505  |   취재본부 : 055)532-0505  |  광고부 : 055)532-0505  |  이메일 : bsb2718@hanmail.net
Copyright © 2022 비사벌뉴스.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