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갈대꽃과 억새꽃이 바람에 몸을 맞기고 높은 가을하늘을 흔든다.

가을을 대표하는 꽃은 들국화(쑥부쟁이), 코스모스라 하지만 필자는 갈대꽃과 억새꽃을 꼽는다.

생태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은 갈대나 억새는 꽃은 관심 밖의 일이다. 노랑, 분홍, 빨강등 화려하게 피는 꽃에 비하면 갈대나 억새꽃은 색도 없고 향기도 없으며 꿀마저 없다.

예쁜 색과 향긋한 향기를 가진 꽃들은 나비, 벌등 곤충을 불러들여 꿀을 선물로 주고 수정을 부탁한다. 이런 꽃들은 충매화(蟲媒花)라 부른다.

반면 갈대꽃 억새꽃은 바람에 의지해 수정하는 풍매화(風媒花)는 꽃은 피어있으나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소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메타스퀘어등 키 큰 나무들은 대부분 풍매화이다.

오늘같이 바람 부는 가을에 산길을 걷노라면 후드득 엄마나무를 떠나는 도토리를 볼 수 있다. 도토리 알은 둥글며 탁구공처럼 통통 튀어 오르며 엄마나무에서 멀리 멀리 굴러간다. 큰 참나무는 풍년 때는 약 1여개, 흉년 때는 3~400여개의 도토리가 열린다고 한다. 이 열매는 산에 사는 동물들의 겨울 양식이다. 다람쥐, 청설모,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어치 등이 좋아한다.

이맘때면 언론에서 산이나 공원에서 도토리를 줍지말자는 홍보를 하는 것은 동물의 먹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은 보릿고개(춘궁기)시절 도토리를 말려놓았다가 양식이 떨어지면 꺼내먹은 대표적인 구황식물(救荒植物)이었다.

도토리가 인류의 양식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증거가 2004년 신석기 비봉리패총에서 발견됐다.

발굴결과 도토리 저장구덩이가 90개 나타났다. 다람쥐등 산짐승들과 신석기인 들이 양식을 차지하기 위해 치역하게 경쟁했다는 이야기다.

○ 8,000년 전 신석기시대 비봉리패총

태풍은 산하를 할퀴고 많은 피해를 입히지만 가끔 뜻하지 않는 선물을 남기기도 한다.

2003년 태풍 매미는 우리에게 비봉리패총이라는 중요한 선물을 남겼다.

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다대포에서 60km 상류, 내륙 깊숙한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에서 창녕땅 최초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밀양 화악산 일원에서 발원한 청도천(옛 래진천, 22.4km)이 18km 달려 하천 폭이 넓어지는 언덕배기에 추운 빙하기를 이겨낸 신석기 사람들이 터를 잡은 것이다.

낙동강에서 청도천 상류로 약 4km 떨어진 곳이다.

긴 빙하기가 끝나고 현재의 낙동강 U자 계곡으로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비봉만이 형성되었다. 비봉만은 청도천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반짠물 즉 기수역(汽水域)이었다.

기수역은 플랑크톤등 먹이가 풍부하여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가 모여드는 곳이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민물과 바다고기의 약 80%가 일생에 한번은 반짠물 지역에 산다고 알려져 있다.

파도가 잔잔한 내륙 깊숙한 비봉만은 따뜻하고 경사가 완만한 산자락이 있어 고대인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 시기에는 남자들은 산짐승을 잡는 수렵(狩獵)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로(漁撈)를, 여자들은 나무의 열매나 뿌리를 캐는 채집(採集)을 하며 살았다.

○ 비봉리패총의 발견과 발굴

2003년 태풍 매미는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다음해인 2004년 어느 날 태풍 피해 복구사

업으로 비봉리마을 입구 왼편에 양배수장건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당시 “창녕문화유적분포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료 수집차 지나던 동아세아연구원(사학자)이 터파기 흙더미에서 하얀 조개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전문가의 예감은 적중했다.

찬찬히 살피던 눈에 신석기 빗살무늬토기편이 들어왔다. 신석기시대 패총을 발견한 것이다. 신속히 긴급 구제발굴이 시작되었다.2004년 여름 총 27일간 시굴조사(試掘調査), 2004년 11월 30일에서 2005년 8월 23일까지 1차 발굴조사(發掘調査), 2010년 3월 15일에서 10월 9일까지 2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있었다. 역사학자 임학종박사다.

경남에서 유일한 신석기 전문가인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실장 임학종박사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져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다.

학자로서 평생 발굴하기 어려운 행운을 얻어 승승장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김해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발굴되는 유적마다 최초, 최고의 수식어 붙었다.

발굴이 끝나고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례적으로 2개월 만에 사적 제486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유적을 발굴한 임학종학예사는 전체유적의 절반도 발굴하지 못해 못내 아쉽다는 말이 진하게 남아있다.

언젠가 반드시 나머지 발굴이 시작되길 기대해 본다. 발굴 후 우리나라 최초 신석기박물관을 세우면 부곡온천과 연계한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신석기유적과 습지가 결합된 타임캡슐, 최초와 최고를 만들다

△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8,000년 전 배를 발견하다.

△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동물(멧돼지)무늬토기편이 발견되다.

△ 우리나라 최초의 망태기를 발견하다.

△ 우리나라 최초로 분석(똥화석)을 발견하다.

비봉리패총은 습지와 결합된 매우 특이한 경우다. 습지 아래에 있는 패총유적은 진흙과 물로 인해 산소와 거의 완벽히 차단되어, 유기물인 나무, 짚풀, 도토리, 솔방울등 열매가 섞지 않고 완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당시의 유기물 유적이 수천 년 동안 그대로 보존되어 고생태환경이나 신석기인 들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획기적인 유적이다.

8천 년 전 나무로된 배와 노가 발견되었으며, 짚풀로된 망태기, 도토리와 씨앗 등이 썩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육지의 패총에서는 출토가 불가능한 유물인 것이다.

토기편에 그려져 있는 멧돼지 그림은 당시 멧돼지도 중요한 수렵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똥화석은 신석기인 들의 식생활과 기생충 감염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진귀한 유물이다.

○ 8천 년 전 배 2척, 비봉리 1호와 2호

사학자 임학종단장에게 운명 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기적같은 비봉리 1호 배는 2004년 6월 24일, 당시 발굴단장인 임학종학예사의 손에 의해 발굴된다. 발굴 작업을 하던 단원 한명이 자리를 비운 탓에 대신 투입된 단장의 손끝을 기다린 것일까...

출토된 나무배는 그 제작연대가 8천여 년 전쯤의 신석기 시대 유물이었다.

200년 된 소나무로 만들어진 통나무배다. 간석기(마제석기, 磨製石器)로 딱딱한 소나무 속을 파기 어려워 통나무 속을 불에 태워 깎아낸 자국인 초흔(焦痕)과 자귀로 깎은 자국이 있다. 배의 크기는 길이 3.1m~4m, 최대너비 0.8m, 깊이 0.2m이다. 이 배는 한반도에 살았던 고대 선사인의 뛰어난 선박기술과 해양문명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는 경주 안압지 배(8세기),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11세기), 안좌

도선(13~14세기), 달리도선(14세기) 등 모두 역사시대의 것들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알려진 신석기 패총에서 발굴된 토리하마(鳥浜)1호나 이키리키(伊木力)유적보다도 약 2천년 이상을 앞서는 것이다. 이집트 쿠푸왕 피라미드 고선박(4천6백여 년) 보다 3,400년 앞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된다. 그리고 약 7000년 전 신석기시대 노(櫓)도 함께 발굴됐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해양 어로(漁撈)에 관한 자료가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져 있다. 암각화의 고깃배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비봉리에서 출토된 두 척의 통나무배에 비춰보면 신석기시대부터 배를 타고 이웃과 교류를 하거나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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