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의

신돈은 전민변정사업뿐만 아니라, 이를 부분적으로 보완해 주거나 자신의 정치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정치개편도 시도합니다. 하나는 산관(散官)의 통제 책이라는 것으로, 지방의 은퇴한 전직 관료들이 백성을 침탈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자격(循資格)의 실시라는 것으로 연령, 근무연수와 고과(考課)를 통해 순차적으로 관리로 등용하거나 관품을 높여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또 개혁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왕 측근의 몇몇 재추를 선발하여 궁중에서 기무를 참여케 함으로써 도당의 권한을 제약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제도로서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실시합니다. 이것은 변칙적인 것으로 공민왕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개혁을 담당한 실무인사들을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변칙적인 것으로 공민왕의 정치적 지지기반인 개혁을 담당한 실무인사들을 실무자들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재부와 추부의 인원은 35명 정도인데, 이것을 합쳐 ‘도당(都堂)’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수가 많고 힘이 강화되어 있어 왕권이 미약했던 것입니다.

임금이 명령을 내려도 “도당에서 합의하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반발했단 말이죠. 그런데 신돈의 개혁으로 거기에 자기 핵심을 뽑아다가, 요새 말로 하면 경제수석, 사정수석 등 청와대 수석으로 데려다 앉혀놓았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였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균관의 중영과 과거제도의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정치개혁 세력을 육성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성균관의 중영으로 이색, 김구용, 박상충, 정몽주, 박의중, 이숭인, 정도전등이 모여 성리학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우왕 9년에 가면 새로 부상하는 명나라의 사대를 할 것인가 그대로 원나라에 사대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다가 이인임 정권에 의해 거의 다 유배를 가게 되는 등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했던 사람들로 파악됩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여말의 전제개혁이나 조선건국을 둘러싼 정치적 대립에도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인물들로서, 공민왕대 성균관 중영의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이제현인데, 그는 충선왕 때부터 공민왕 때까지 5대 왕을 섬긴 사람으로 그만큼 특권도 많이 누렸습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10년 동안 원에 억류되어 있을 때 국내에 지지기반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제현입니다. 그는 개혁적인 성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신돈은 “유자(儒者)들은 좌주니 문생이니 하고 안팎으로 줄지어 있으면서 서로 간청하여 하고자 하는 바를 자행하는데, 이제현 같은 사람은 문생이 문하에 또 문생을 봄으로써(門生門下見門生) 드디어 나를 메운 도적이 되었으니 유자들의 폐해가 이와 같습니다”(『고려사』권110, 열전23 이제현전)라고 하여 이제현을 엄청나게 혹평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현은 당시 막후 실력자로서 초야신진이나 유생을 뒤에서 조정하여 개혁에 가장 큰 걸림 돌이 되고 있었거든요. 또 이제현의 제자들이 시관(試官), 즉 과거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답안을 매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행세를 못했습니다.

신돈이 이렇게 이제현을 지목해서 ‘도적 같은 놈’이라고 비판했던 것은 유자들의 세력결집을 막고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해줄 세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세신대족의 배제를 원칙으로 하는 한 세력결집을 꾀하는 이제현과 백문보, 이인복, 한수 등은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세력결집의 분리를 가능케 하고 또 정당화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가 바로 과거제도의 개혁인데, 이것은 공민왕 17년에 친시(親試)를 실시하고, 이듬해에는 회시(會試)제도를 채택하여 과거에서 시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지공거, 고시관, 시험관들이 나가서 시험 감독을 했는데, 이때부터는 공민왕이 직접 과거장으로 가서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합격자를 선택하고 장원을 주는 식이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과거를 통한 좌주.문생 관계를 부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에서 좌주.문생 관계의 성립이 불가능해진 것은 물론, 기존에 성립되어 있던 좌주.문생 관계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죠. 즉 과거제도의 개혁으로 공민왕의 좌주.문생 관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신진관료들에게 좌주.문생 관계를 청산하고 개혁정치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리하고 이제현과 초야신진, 유생들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개혁추진세력으로 이색을 비롯하여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등 공민왕대에 등제한 2, 30대의 패기 발랄한 젊은 문신들을 개혁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진관료중에서 정추나 이준오 같은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여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네 신분이 뭔데 감히 왕 앞에서 장난스럽게 왕과 같이 앉거나 음식을 먹거나 할 수 있느냐”고 반발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당시는 측근정치하고 불렀는데, 원 간섭기에는 계속 이러한 측근정치, 패행정치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유교이념이 확고한 사람들에게는 한낱 중놈이 정치를 한다고 아니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죠. 그런 반발심에 개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은 신돈 정권에 참여했어요. 특히 성균 좌주로 있었던 임박이라는 인물은 나중에 공민왕의 명을 받아 신돈을 죽이게 되지만, 이 사람이 신돈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자고 권고했던 당사자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당시 신진관료들은 신돈의 개혁에 절대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개혁적 분위기로 인해 신진사대부들은 기존의 권력 매개고리들을 끊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재편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고려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려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점차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를 계기로 신진관료들은 이전처럼 세족화하려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고려후기의 사회변동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했던 중소지주들이 이로부터 점차 정치세력으로 대두했습니다. 그리고 우왕대 이인임 정권의 반동기를 거쳐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신진관료의 정치적 우세가 확정된 다음에는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전제개혁을 통해 중소지주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성계의 무력적 기반을 통하여 신진관료 내의 급진파, 즉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전제개혁, 과전법의 실시, 관제개편, 지방제도의 정비, 척불론의 전개와 같은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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