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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황새목 돌팔이 군수비석걸과 조운한애민선정비
비사벌뉴스 | 승인 2018.05.08 22:10

선정비(善政碑)

중국 후한 때 오장(吳章)이 군의 태수로 좋은 정치를 베풀어 그가 죽은 후 묘앞에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는데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충렬왕때 청백리 최석(崔碩)의 송덕을 기리는 순천팔마비(順天八馬碑)가 시초다.

옛날 지방 수령이 좋은 정치를 베풀면 선정비를 세워서 기렸다.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로 송덕비(頌德碑)라 하기도 하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불망비, 송덕비, 선정비, 공적비, 타루비(墮淚碑), 거사비(去思碑)등은 백성을 위해 좋은 정치를 베풀어 잊지 못하겠다는 칭송의 뜻이 담겨있는 비석이다.

창녕군에도 선정비가 즐비하다. 창녕 만옥정공원 35기, 영산 남산호국공원 32기, 영산면 남산 마애비 1기, 남지읍 칠현 2기, 대합면사무소 1기, 남지읍 시남 1기 수개리 1기 성사 황새목 1기등 약 74기의 비석이 서있다. 73기중 흥학비 2기, 남무아미타불 1기등 3기를 제외하고 71기가 선정비다.

황새목 군수비석껄

남지읍에서 1021번 국도를 따라 3km쯤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편 매전마을(관동) 동쪽 성사 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산줄기가 황새 모가지처럼 길게 내려오다가 잘록하게 들어간 곳이라 황새목이라 불렀다. 이 목은 남지에서 성사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이곳을 통과해야 산 넘어 고곡(옛 창녕현 남곡면)으로 갈 수 있었다.

황새목에는 목 양쪽에 집들이 있었고 주막도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 정겨운 방앗간도 있었으나 이제는 철거되어 흔적 없이 지워졌다.

동편으로 학암(鶴巖)과 대성(大成)으로 가는 길옆을 군수비석걸이라 하고 현감조운한선정비를 돌팔이 군수비라 부른다. 바로 계성천 성사교 다리를 건너기 직전에 있다.

『현감조운한애민선정비』는 영산현감(1867~1870)을 지냈던 조운한 현감의 선정비로 남지읍 성사리(옛 영산현 도사면) 주민들이 1876년에 세운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금을 화폐대신 곡식으로 대신했는데 강변 나루터에 곡식을 저장하는 세곡창(稅穀倉)이 있었다.

낙동강 상류지역은 상주 낙동나루까지 운반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남한강을 거쳐 한양으로 실어 날랐다.

중하류지역은 강선(江船)으로 삼랑진까지 실어가서 서해안으로 운행이 가능한 해선(海船)에 옮겨 실어 한양으로 보내졌다.

아들은 목사 아버지는 현감

영산현의 세곡(稅穀)은 낙동강 하류 100여리 거리 삼랑진까지 실어 내렸는데 배가 좌초되거나

도중에 도적떼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허다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막심했다.

안타깝게 여긴 영산 현감이 진주목사에게 건의하여 직접 송진나루에서 싣고 가도록 해 주었다 하여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선정비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때 진주목사는 조운한 현감의 아들이었다 하여 세인들이, "아들은 목사(牧使), 아버지는 현감(縣監)" 이라 조롱하였다.

현감 아버지가 벼슬이 높은 목사 아들에게 부탁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없애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사가들이 출세 못한 아버지를 은근히 우스개로 알았으며, 그래서 조 현감을 돌팔이 군수로 폄훼되어 세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유교질서가 엄격하던 조선시대 아버지로써 아들에게 부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현감은 체면대신 백성의 고통을 먼저 생각한 앞서간 인물이었다.

조운한(趙雲漢)은 1867년(고종 4년) 7월에 영산현감으로 부임하여 1870년(고종 6년)에 백천으로 이임한 58세의 나이 많은 영산현감이었다.

조현감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진주목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때 일어난 이야기다.

그가 부임해 보니 곡식으로 세(稅)를 내는데 영산 고을 사람들이 배에 직접 실어 밀양 삼랑진까지 싣고 가서 바치고 있었다. 도천면 송진나루에서 곡식을 배에 싣고 하류로 가다보면 홍수가 나서 배가 부서지기도 하고 도둑 떼에 양곡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그러면 다시 양곡을 거두어 실어가야 하므로 세곡을 이중삼중 부담하는 결과가 되었다.

"원님, 세곡을 송진나루에서 직접 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면 송진나루부터 나라에서 책임지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백성들의 간절한 진정을 듣고 조현감은 진주목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몇몇 관속을 거느리고 한나절을 걸어 진주 목사(牧使)가 있는 동헌에 이르렀다. 입구에는 수령이하개하마(受令以下皆下馬)라는 비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이 하마비는 목사 이하는 말(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현감이 무엄하게도 상관을 만나려면 마땅히 문전에서 가마에 내려 걸어가야 되는데 버젓이 가마를 탄 채 동헌 마루까지 가는 게 아닌가?

"원님! 내려야 됩니더." / "그냥 가자! 괜찮다."

"안됩니다요." / "괜찮다."

원님이 자꾸 괜찮다는 소리만 반복하자 따라간 부하들은 간이 콩알 만해졌다. 진주목사가 보였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지려니 부하들은 겁을 냈는데 '허! 어인 일인가?' 목사가 대청에서 뛰어내려 왔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바로 진주 목사는 조운한 현감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건의를 받고 그 뒤부터는 삼세를 송진나루까지만 운반하면 되었다니 주민의 큰 부담과 노역을 덜게 하였다.

그러나 영산 고을에는 오랫동안, "아들은 목사 아버지는 현감"하는 말이 돌아 오늘날까지 전하여 내려온다.

조현감은 창녕을 떠난 후 백천현감을 거처 광주목사를 지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종 6년(1869)년 경상감사(慶尙監司) 오취선(吳取善)의 장계(狀啓)에 전답을 측량하여 321결(結)이나 늘렸고, 고종 5년(1868) 경상좌도 암행어사의 장계에 따라 지방관에게 주는 표창을 받은 기록이 나온다.

조운한은 목민관으로써 선정을 베풀었던 인물로 세세연년 그 향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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